
울적할 때마다 ‘이웃집 토토로’(1988)를 꺼내보는 ‘지브리 신도’ 중 한 명이지만, 다큐멘터리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사진)을 보기 전까진 알지 못했다. 이 ‘세기의 천재’에게도 실패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1979년 극장에 걸린 미야자키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제작비 절반도 회수하지 못하는 흥행 참패를 기록했다. 그 충격으로 애니메이션계를 떠날 결심까지 했던 그는 디즈니와의 협업 차 머물던 미국 호텔방에서 절망 속에 떠오른 상상을 계속 그렸다고 한다. 나우시카가, 토토로가, 모모노케 히메가 거기서 나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엔 근심이 가득하다.” 다큐 첫머리의 이 해설에 과연 그렇군! 감탄했다. 전쟁과 폭격, 어머니의 부재라는 어릴 적 체험은 그의 작품에 반복되는 설정 중 하나다. 인간은 왜 이렇게 잔인한가, 문명이란 녀석은 제대로 가고 있나, 흉포한 자연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그는 늘 근심했고 이를 더없이 아름다운 그림에 담아 전했다. 그의 세계관을 집약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모노노케 히메’(1997)가 완성된 것은 그의 나이 56세 때 일이었다.
영화 속 미야자키는 시종일관 시니컬하다.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은퇴를 생각하고, “영화로 세상을 바꾸려 했는데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그런 게 바로 감독의 일이야”라고 자조한다. 그럼에도 그는 은퇴를 번복하며 그림을 그려내고 “아무리 엉망이어도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줄기차게 전하고 있다. 절망 가운데도 멈추지 않고 근심하는 이들로 인해 세상은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오늘은, 믿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