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락내리락 미 국채값…스테이블 코인은 스테이블할까

2025-08-01

[이태환의 세상만사 경제학] 19세기 은행권 vs 21세기 코인

루시 몽고메리의 『초록지붕집 앤』. 우리에게는 『빨강머리 앤』으로 잘 알려진 소설이다. 귀여운 수다쟁이 소녀가 주인공이다 보니 명랑한 분위기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마무리 부분에서는 매슈 아저씨가 돌아가시는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한다. 거래하던 은행이 망하는 바람에 평생 모은 돈을 모두 잃게 된 매슈 아저씨가 충격으로 쓰러진 것이다.

# 자유은행시대와 뱅크런

이 소설의 배경은 19세기 후반이다. 당시에는 은행이 망하는 일이 아주 흔했고, 그러면 사람들이 평생 모은 돈을 날리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은행 규제가 별로 없었을 뿐더러 미국에는 중앙은행도 없고 전국에 통용되는 화폐도 없었다. 19세기 중반 ‘자유은행시대(Free banking era)’에서 이어지는 이 시기에는 민간은행이 제각기 발행한 은행권이 화폐 역할을 했다. 당시 거래의 기본 단위는 금·은 등 귀금속이었는데, 금을 직접 들고 다니려면 무겁고 불편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금은 은행에 맡겨 놓고, 그 사실을 증명하는 종이 증서인 은행권을 금 대신 들고 다니며 지급·결제를 했다. 나중에 누군가 다시 금이 필요해지면 은행권을 들고 은행에 찾아가서 금을 받아가면 된다. 편하고 좋은 시스템이지만 그리 안정적이지는 못했다. 은행 입장에서는 금을 맡아주고 은행권을 발행해서 지급·결제 서비스만 계속해주다 보면 정작 돈은 벌 수 없다. 그래서 은행은 예금으로 들어온 금 중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대출해 주고 이자를 받았다. 모든 예금자가 동시에 금을 다 찾아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일부는 대출이 가능하고, 이렇게 통화를 창출해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도 민간은행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그런데 어쩌다 한 번씩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금을 돌려달라고 하는 일이 생기면 은행은 돌려줄 금이 모자라 부도가 나고 망한다. 매슈 아저씨가 거래하던 은행도 이렇게 망했다. 또 일단 어느 은행이 부도가 날 것 같다고 소문이 나면 건실하던 은행도 정말로 부도가 난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남들보다 먼저 자기 예금을 찾아가려고 몰려오기 때문인데, 이게 바로 뱅크런이다.

20세기 초까지 정말 흔했던 뱅크런을 없앤 것은 예금자 보험의 도입이었다. 은행은 망해도 예금은 돌려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굳이 은행에 달려갈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위기 시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하는 중앙은행이 설립되고 법정지급준비율 등 은행 규제들이 도입되면서 요즘은 제1금융권에서는 뱅크런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규제가 좀 덜한 제2금융권이나 그 바깥에서는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사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특정 자산(주로 현금)을 받아놓고 유통에 편리한 다른 토큰이나 포인트를 지급했다가 거래가 끝나면 다시 정산해주는 시스템이 많이 존재한다. 백화점이나 재래시장의 상품권이 대표적이고, 포털사이트에서 각종 거래에 쓸 수 있는 쿠키나 백화점 상품권, 카페 체인점의 기프티콘도 모두 같은 구조다. 2021년 한국에서 떠들썩했던 머지포인트 사태도 그 본질은 포인트와 현금을 1대 1로 바꿔 주겠다는 운영사의 약속이 깨지면서 뱅크런이 일어난 사례다. 가상자산(코인) 시장도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로 돼 있고, 따라서 뱅크런(코인런)에 취약하다.

# 달러 패권 지킬 의도 ‘지니어스 법안’

2025년 7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지니어스 법안(Genius Act)에 서명했다. 민간에서 발행하는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규제의 틀을 마련하는 것인데, 코인 발행액과 동일한 금액의 담보자산을 언제나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담보자산의 종류는 현금 달러나 미국 국채로만 제한했다. 우리가 요즘 흔히 코인이라고 부르는 가상자산들의 출발점은 비트코인이다. 중앙은행으로부터의 독립을 기치로 내걸고 만든 것이다 보니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아서 코인 가격이 아주 널뛰듯 변한다. 1비트코인의 가격은 몇 개월 사이에 수천, 수만 달러씩 변동하기도 한다. 이래서는 은행권처럼 안정적인 거래수단이 되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테이블 코인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코인의 가격이 다른 기초자산 대비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인데, 1토큰이 1달러로 고정된 테더(USDT)나 US달러코인(USDC)이 대표적이다. 토큰 하나를 1달러로 언제든 바꿔준다고 하면 토큰의 가치가 실제로 1달러로 안정되는 원리를 이용하는 것인데, 토큰 가격이 1달러보다 내려가면 사는 사람이 많아지고, 1달러보다 올라가면 파는 사람이 많아져 균형가격 1달러로 돌아온다. 이번에 지니어스 법안에서 요구하는 것은 이 계약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모든 토큰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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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보 기반으로 발행하라는 것이니, 뱅크런을 예방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자유은행시대의 은행은 딜레마에 직면해 있었다. 금을 전혀 대출해주지 않고 다 갖고 있을 경우 뱅크런의 위험은 없겠지만 수익을 낼 방법이 없다. 그런데 이 논리는 21세기 스테이블 코인 시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면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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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보자산을 유지해야 하는 코인 발행사는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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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결제 및 송금 수수료가 수익 기반이 된다. 달러를 토큰으로, 토큰을 달러로 바꿀 때 수수료를 받거나, 앞으로 코인을 결제에 사용할 수 있는 온·오프라인 상점이 늘어나면 그쪽에서 결제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후발주자인 스테이블 코인이 신용카드나 현금 대비 경쟁력이 있으려면 결제수수료가 아주 낮아야 하고, 그렇다면 가맹점이 아주 많아져야 수익이 난다. 결론적으로, 미국 시장 전체를 덮을 수 있는 달러 스테이블 코인의 종류가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것보다 많아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 신용카드 시장을 괜히 비자와 마스터 단 2개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페이스북도 몇 년 전 가상화폐 리브라(또는 디엠)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다가 결국 여러 문제로 사업을 접은 바 있다.

# 한국도 스테이블 코인 법안 정비 필요

그러면 담보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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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유지하는 스테이블 코인에는 정말 아무런 위험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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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담보자산 중 현금은 보통 은행에 맡기는데 은행이 파산하면 문제가 된다. 실제로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을 때 USDC의 발행사 서클이 이곳에 33억 달러를 예금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USDC의 가격이 86센트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국채는 가격 변동이 가능해서 더 위험하다. 담보로 갖고 있는 국채의 가격이 떨어지면 담보자산의 가치가 법정 기준에 미달하게 되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 코인런의 위협에 노출된다.

한편 스테이블 코인 발행액이 늘어나면 이것 자체가 국채 가격을 밀어 올리게 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담보 보유를 위해 국채를 사야 하기 때문이다. 국채 수요가 많다는 것은 미국 정부에 돈을 빌려주겠다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국채 가격 상승은 국채 이자율 하락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 지니어스 법안의 다른 목표가 드러난다. 국채 이자율을 낮춰 미국 정부의 재정 부담을 덜고, 동시에 스테이블 코인에 기반한 국제 결제망을 미국이 선점함으로써 달러의 패권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원화 스테이블 코인으로 대응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만든다고 해도 제대로 자리잡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에서도 달러 스테이블 코인을 살 수 있는데 굳이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원화 스테이블 코인을 쓸 이유가 없지 않나.

그래도 21세기의 스테이블 코인이 19세기 자유은행시대의 민간은행권과 거의 완전히 같은 구조와 같은 리스크를 갖고 있는 만큼, 가상자산이 금융시장 불안을 유발하지 않도록 한국에서도 스테이블 코인을 정의하고 규제하는 법안은 빨리 정비하는 것이 좋겠다. 빨강머리 앤이 매슈 아저씨처럼 가까운 사람을 잃는 일이 또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이태환 세종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와 스탠퍼드대에서 공부하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한국경제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했다. 주변의 사회문화 현상을 경제학으로 해석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SERICEO에서 5년 간 ‘세상만사 경제학’ 강의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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