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십 대 한 시절, 이런저런 이유로 순천 송광사에서 반 년간 지냈다. 그 시절, 겉모습만은 완전히 행자승이었다. 자줏빛 장삼을 걸치고 막 출가한 스님들의 고된 일상을 그대로 따랐다. 이른 새벽 쌀을 씻고 밭에 가서 푸성귀를 뽑아 다듬었다. 가마솥에 쌀을 안치고 장작불을 때는 것이 주어진 업무였다. 물론 진짜 출가한 행자스님은 찬을 만들고 국을 끓이고, 전문적인 일을 했다. 공양 준비에 이어 바루공양이 끝나면 절집 곳곳을 쓸고 닦았다. 몸은 논산훈련소 훈련병만큼이나 고단했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고요했던 ‘송광사 시절’이었다. 절이라고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가본 게 전부인 나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승가의 경험을 그 해 하게 된 것이다.

산사의 여름밤은 감동적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이 많았다. 운 좋은 밤이면 절 뒤 조계산 울창한 숲으로 별똥별이 떨어지는 풍경도 보게 된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이 연상되는 밤이었다. 문득 ‘하바별시’가 생각났다. 하늘, 바람, 별, 시를 뒤죽박죽 섞어 놓고 게재된 시집 이름을 묻는 고약한 고3 때 시험문제였다. 덕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하바별시’로 달달 외웠다.
가끔은 인근 읍내를 다녀왔다. 어느 여름밤이었다. 당시는 울퉁불퉁했던 비포장도로, 조금만 방심하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그믐께쯤, 사방이 칠흑 같아 길 찾기가 무척 어려웠다. 머리 위 숲사이로 별이 보이면 길이 있다는 의미다. 그날 밤은 별이 등대였다.
유월이 되면서 본격적인 여름 느낌이 난다. 서울 하늘에도 친환경 자동차 덕분인지 별이 제법 많아졌다. 미학자 게오르크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첫 문장을 이렇게 쓴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석학의 말인 만큼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 문장이 주는 가장 원시적인 의미를 깨달은 곳은 그해 여름밤이었다. 그리고… 시절이 하수상해도 가끔은 별을 헤는 밤을 가져야겠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