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연: 전호태, 최미선
역사학자 전호태 울산대학교 명예교수와 인문학 운동가 최미선 한약사가 만나 매달 한 차례씩 깊이 있는 지식을 재미있고 유쾌하게 풀어내는 시간을 가집니다. 울산저널TV에서 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최미선(이하 “최”): 안녕하세요. 다양한 주제의 역사와 인문 지식을 재미있고 유쾌하게 풀어가는 시간, 인문톡쇼. 저는 최미선입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전호태(이하 “전”): 네. 역사학 하는 전호태입니다.
최: 오늘은 ‘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요. 문 만큼 다양한 상징으로 쓰이는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인류 역사에서. 이 문은 어떻게 출현하게 됐을까요?
문이란 집을 만들면서 안과 밖을 구분하기 위해 생긴 것
전: 문이란 집을 만들면서 출현하는 거잖아요. 사람이 처음 살던 데는 대개 동굴의 입구인데, 거기를 떠나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 게 집이에요. 처음에 집은 풀과 지푸라기 같은 것을 얽어서, 정면에서 보면 삼각형처럼 보이는 그런 형태. 일종의 원뿔 같은 거죠. 그런 형태로 집이라는 걸 만드는데, 드나들어야 하니까 문으로서 기능하는 별도의 공간을 이 원뿔형 집에다 만드는 거예요. 그게 문의 출발이고, 그러면서 문의 고유한 기능이라는 것이 인식되기 시작하는 거지.
최: 그럼, 문이 생김으로 인해서 공간이 구획되네요. 안과 밖.
전: 그렇죠. 실내와 실외.
최: 상징적인 의미로도 많이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문의 의미가 확장되면 시간, 존재, 차원의 구분으로도 사용
전: 그것이 확장되면 이 세상과 저세상이라든가, 아니면 산 자와 죽은 자, 우리가 사는 공간 전체와 다른 공간.
최: 이질적인 공간과 친숙한 공간.
전: 그렇죠. 예를 들면 우리가 사는 공간은 땅인데 하늘로 가는 경계에 문이 있다고 생각한다든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경계에 문이 있다고 생각한다든가. 그러면서 문의 개념이 확대되고 인식의 지평도 넓어지는 거죠.
최: 공간적으로 문이 구획된다면 시간적으로도 구획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통과 의례라든지, 성장사에서 어떤 문을 설치하든지.
전: 예를 들면 사람과 동물이 교통할 때 그 경계에 있는 어떤 문.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식 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그런 문이 존재할 수가 있는 거고. 언어의 문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서로 말하는 언어가 다를 때 어떻게 하면 통하느냐. 그 이질적인 세계를 통과하게 하는 통로로서 문의 기능이 그때 중요해지는 거지.
최: 현대에 들어와서는 문이 사적 공간을 지키는, 공적 공간을 구획하는 기능으로서 역할이 강조되는 것 같아요. 자녀분 키우시면서 문 탁 닫고 들어가는 자녀의 뒷모습을 본 적 있으신가요?
전: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그런 게 없습니다.
최: 문이 없으셨나요, 혹시?
문은 공간을 단절로도 통로로도 기능한다
전: 문이라는 게 어떤 공간을 닫아버리는 기능도 있지만, 통로로서 기능도 있잖아요? 어떤 기능이 더 활성화되어 있느냐는 문제인데, 저는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걸 공유해 왔어요. 같이 책을 읽는다든가, 어떤 작은 문제라도 같이 의논한다든가. 제가 베드 타임 스토리만 10년 넘게 했습니다.
최: 그러니까 문을 차단의 용도로 쓴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하는 통로로 쓰셨다는 말씀인 거죠? 대단하십니다. 방금 말씀하셨던 얘기들을 종합해 보면 옛날 사람들의 세계관이 요즘 사람들보다 더 넓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 그런 면도 있죠.
최: 천국과 용궁과 지상을 하나의 문으로 다 통과하게끔 했고,
전: 문이 열려 있었던 거죠.
최: 다른 존재자들과 결혼도 하잖아요. 뱀과도 결혼하고. 심지어 나무하고도 결혼하잖아요. 나무가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고. 종자의 구별도 없고 공간의 구획도 없고 시간 차도 없고. 요즘 우리의 세계관과는 비견이 안 될 정도의 세계관이었던 것 같아요.
현대로 오면서 문은 닫는 기능이 강조되면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전: 어떻게 보면 선사시대 이래 근대까지 우리 삶의 형태가 자연과 단절돼 있지 않은 부분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사람과 동물 사이 혹은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 문이 통로로서 기능을 많이 했었는데, 현대에 오면서 그런 문들이 닫는 문으로서 기능하게 된 데 주원인이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산업혁명 이후에 인간 중심의 도시 문명이 발전하면서 이전에는 자연스럽게 알았던 자연의 모든 것들을 모르게 되는 거예요.
최: 닫혀버렸네요.
전: 닫혀버린 거죠. 아파트 같은 데서 살면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자녀와 부모 사이에도 문 하나로 서로 삶의 공간과 사유의 공간이 구별돼 버리는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거죠.
최: 문 하면 특별히 생각나는 문이나 생각나는 작품이 있으실까요, 교수님은?
전: 문에 대해서 예전부터 생각을 많이 했는데, 중국의 고대 회화에 보면 천문이라는 게 나와요. 도교적인 개념인데 하늘 천 자를 쓴 천문. 화상전(畵像塼)이라든가 고분벽화 같은 데 보면 그런 천문을 빼꼼하게 열린 상태로 표현해 놓는 경우가 많아요. 처음에는 왜 저렇게 빼꼼하게 열린 상태로 표현할까, 했는데 보니까 그야말로 이 세상과 저세상, 땅과 하늘 사이에 통로가 닫혀 있지 않다는 이미지 내지는 그런 지식을 전하기 위해서 살짝 열린 상태로 표현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고.
최: 통로로서의 문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전: 그런 면에서 천문이라는 것이 근대 사회에 오면서 사라진 문의 개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최: 말씀 들으니까, 인간에 대한 굉장한 긍정성이 느껴지거든요. 천문이 열려 있으므로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상정했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현대는 천문은 들어갈 수 없는 공간, 막힌 공간, 차단된 공간, 그러니까 지상에서 아웅다웅 살아야 하는 인간의 모습. 그래서 고대인들이 더 인간적이고 또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전: 문학에서도 문에 대한 게 많이 나오지 않나요?
당신 앞에 열린 문은 당신만이 열 수 있다
최: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카프카의 <법 앞에서>라는 작품이거든요. 시골 사람 하나가 법이라는 문 앞에 서요. 들어가려고 하니까 문지기가 못 들어가게 해요.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그런데 들어가려고 하면 들어갈 수는 있다. 그런데 문을 통과할 때마다 더 센 문지기가 나와서 너를 가로막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그래서 그 문이 열리기를 기다립니다. 평생 열리지 않아요. 그런데 죽음에 이르러서 너무도 궁금한 한 가지가 생긴 거예요. 그래서 문지기에게 시골 사람이 묻죠. 왜 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까? 그러니까 이 문지기가 하는 말이 있어요. 그 말을 제가 오늘 적어 왔거든요.
전: 아 그래요? 한번 읽어봐 주세요.
최: 문지기가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없어.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니까요. 이제 나는 가서 문을 닫아야겠어. 오로지 이 사람만이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이었는데 끝까지 그 앞에 서성거리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전: 통과를 못 했네요.
최: 그렇죠. 죽음과 동시에 이 문은 닫혀버리고 말죠. 상징하는 바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은 철학자가 이 작품을 해석하겠다고 달려들기는 하는데, 누구나 각자 열고 들어가야 하는 그런 문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전: 카프카가 역시 퀘스천마크를 던지는 데 능하네요.
최: 그렇죠. 요즘 세태를 보더라도 이게 헌법 수호냐 헌법 파괴냐, 이 앞에서 우리가 어떤 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가야 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 세상이 왔잖아요.
공간의 성격이 다를 때 문을 열기가 어렵다
전: 통과와 관련해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씨름하는 장면이 하나 나와요. 그 씨름하는 그림의 출현 과정을 쭉 추적해 보면 우리가 아는 이 세상과 저세상 사이에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죽은 자도 쉽게 통과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 문을 지킨 자를 그리스 신화에서는 뇌물을 주는 것처럼 표현한 부분도 있지만, 여기서는 서역 사람으로 대표되는 문지기와의 씨름에서 이겨야만 하는 거예요.
최: 저승 가는 길도 쉽지만은 않네요.
전: 그럼요. 누구에게나 저승이 열려 있는 것도 아니죠. 그때는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는 개념이 약했는데, 문제는 사람이 죽으면 세상을 건너가야 하는데, 건너가는 그 바로 앞의 문을 쉽게 통과시켜 주지 않는 거예요. 카프카의 문은 어떤 문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런 문의 개념은 늘 있죠.
최: 갈 때 서양인들은 돈을 줬잖아요, 동전을. 그 문명이 자본주의를 꽃피운 근원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방금 살짝 들긴 했는데.
전: 그렇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공간의 성격이 다르면 쉽게 못 들어간다는 개념이 있었는데, 중국의 경우에도 죽은 분들에게 노잣돈을 드려요. 가짜 돈을. 그중에 일부는 지신(地神)에게 드리는 거거든요. 지신도 공짜로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 그런 개념이 있는 거죠.
최: 저승 가는 길도 만만치가 않네요. 혹시 교수님은 앞에 낯선 문이 하나 있다고 하면 열고 들어가십니까, 아니면 열리기를 기다리십니까?
전: 일단 보고 있겠죠.
최: 기다리신?
밖에서 열어주길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열어라
전: 최근에 애니메이션 중에 <스즈메의 문단속>이라는 게 나와요. 본 분이 많을 텐데, 일본 사람들이 즐겨서 표현하고 있는 문학적 소재 중의 하나가 문이잖아요. <스즈메의 문단속>에 나오는 문 같은 경우도 주인공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가서 지진으로 황폐해질 수도 있는 상황을 어떻게든 종식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차원을 넘어서는 문이라는 개념은 요즘 세상에서는 가장 큰 화두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히키코모리라고, 자기 세계에 갇힌 사람들이 의외로 많거든요. 그 문은 바깥에서 열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가 열고 나와야 하는 거죠. 각각이 소통이 안 된다고 주장을 하기 전에 자기가 문을 닫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도 있다는 얘기죠.
최: 카프카의 <법 앞에서>가 생각나는 말씀이네요. 결국은 자기가 열어야 하는데. 자신만을 위한 문이었는데. 오늘은 문에 대해서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 감사합니다.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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