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9월30일 영화 <위험한 정사>를 상영하던 서울 명동 코리아극장에 누군가 뱀을 풀었다. 이튿날에는 신촌 신영극장 화장실에서 뱀 열 마리가 출몰했다. ‘뱀 소동’은 영화인들이 벌인 일이었다. 1986년 영화법 개정으로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국내에 직접 배급한 첫 영화 <위험한 정사> 개봉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영화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 시장은 외화 직배의 빗장을 풀었고, 1993년 한국 영화 극장 점유율은 15.3%까지 떨어지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한국 영화는 망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에 맞설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은 외화 직배, 2006년 스크린쿼터(한국 영화 의무상영 일수) 축소 등 보호막이 사라진 후였다. 한국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쓰는 날이 올 것이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관세전쟁’을 벌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일(현지시간) 외국에서 제작된 영화에 100% 관세를 매기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영화 산업이 부진하고 쇠락한 원인이 다른 나라의 ‘문화 침공’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되레 보복 관세로 할리우드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당장 중국이 미국 영화의 수입을 줄일 방침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영화 산업의 영광은 지나갔다.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파상공세에 기진맥진이다. 제작비에는 거액을 쏟아붓고 있는 넷플릭스도 한국에서는 세금을 쥐꼬리만큼 낸다. 수익을 미국 본사로 보내는 방식으로 이익을 축소한다고 한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넷플릭스가 버는 셈이다.
공교롭게도 한덕수 전 권한대행은 지난달 외신 인터뷰에서 넷플릭스 같은 업체에 부과하는 네트워크망 사용료 등 미국이 불만을 제기해 온 비관세 장벽 문제도 논의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트럼프식 문화 전쟁에 상대 패는 확인 안 하고 덜컥 우리 것을 내줄까 걱정이다.
이번에도 트럼프의 변덕으로 끝날지는 봐야겠지만, 지금 미국이 할 일은 관세를 매기는 게 아니라 세계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 애국심만으로 재미없는 영화를 계속 볼 수 없다는 게 세계인의 경험칙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