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청년들이 헤쳐온 것

2025-05-05

서른이 되기 전 장편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고, 연이어 흥행과 비평의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요즘 영화 청년들이 쉽게 꿈꾸지 못할 일이지만, 1980년대 젊은 한국영화 감독 배창호의 실제 이력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배창호의 클로즈 업’은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황진이’ ‘흑수선’ ‘꿈’ ‘러브 스토리’ 등 그의 영화 속 공간을 되짚는 다큐. 상영 후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질문에 답하며 감독이 들려준 이야기는 여러모로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산업 전사들을 다룬 초기작 ‘철인들’은 “흥행은 신경 안 써도 된다”는 제작자의 확언을 받고 시작한 영화라는 것. 대체 어떤 제작자가 이렇게 너그러울까 싶은데, 듣고 보니 부러워할 일은 아니다. 당시는 대종상을 받으면 영화사에 외화수입권을 주던 시절. 영화사들이 한국영화를 만드는 것은 외화 수입 방편이기도 했다. 더구나 검열도 횡행했다. 배창호 감독도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부터 시나리오와 완성된 필름 모두 사전 심의를 받았는데, 원작 소설 그대로인 영화 제목도 처음에는 쓰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영화 만드는 일이 언제라고 쉬웠겠느냐마는, 이번 영화제에서 다시 상영된 ‘비구니’는 그 험난함을 또 다른 방식으로 확인하게 한다. 촬영이 꽤 진행된 상황에서 불교계 반발 등으로 1984년 제작이 중단된 비운의 영화다. 2010년대에 영화사 창고에서 극적으로 발견된 필름을 전주국제영화제가 한국영상자료원을 통해 복원해 2017년 첫선을 보였다. 올해 상영은 지난해 별세한 송길한 작가를 기리는 뜻. 덕분에 이를 처음 보게 됐다. 미완성인 데다 대사 등 소리가 전혀 없는 상태인데도 주연 배우 김지미의 연기는 물론 한국전쟁 피란민 행렬과 폭격 장면 등이 단박에 눈을 사로잡을 만큼 강렬했다. 고인이 된 제작자 이태원 대표와 송길한 작가를 비롯해 2017년 무렵 진행된 제작진 인터뷰는 당시의 충격과 상처를 짐작하게 한다.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찰영감독은 아예 영화를 그만두려고 했다고도 돌이킨다.

만약 그랬다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서편제’ 등의 흥행도, 이태원·임권택·정일성 3인조의 ‘취화선’이 2002년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는 일도 없었겠다. 수상은커녕 칸영화제의 한국영화 초청 자체가 뉴스였던 시절을 거쳐 이제는 올해 칸영화제 공식부문에 한국영화가 한 편도 초청받지 못한 게 뉴스다. 한국영화가 대내외적으로 위축된 마당이지만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상영관마다 젊은 관객들, 영화를 꿈꾸는 청년들이 빼곡하다. 그 모습을 보며 한국영화가 선망은커녕 볼품없는 대접을 받고 외화와 비교되며 폄훼 당하던 시기를 견디며 새로운 영화를 꿈꾸고 시도한 사람들을 새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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