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처럼 어제의 성공 방식이 오늘의 쇠락과 내일의 패망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건국 이래 대한민국은 항상 도전과 위기에 직면했고, 이를 극복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하지만 최근 2차대전 이후의 국제 무역질서가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으며, 과거에 '차이나 리스크'라고 이야기하였던 것이 이제는 '진격의 거인'이 되어 우리 앞에 다가왔다. 핵심광물 등 공급망 리스크, 농림수산업에 직접적 타격을 주는 기후 재난, 국내 저출생과 같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위기가 이야기되고 있다. 과거 한 번도 겪어보지도, 상상하지도 못한 상황이 펼쳐지면서 한국 기업은 생존과 변신을 동시에 이뤄야 하는 전환의 시대에 서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과서적인 이사회의 독립성과 전문경영인의 책임 경영을 마치 신의 계시처럼 제시하는 전문가가 많다. 그러나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려우며, 현실은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다. 수십조원이 필요한 장기 투자와 과감한 사업 전환은 책임감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누군가의 결단 없이는 추진하기 어렵고, 단기 성과에 집중하는 경영진만으로 불확실성이 큰 신사업에 도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반대로 과거처럼 창업자 회장의 '감'과 독단적 리더십에 기댈 수도 없고, 그 자체가 너무나 리스크가 크다. 그래서 자본시장에서는 미래를 조심스럽게 전망하면서 기업 운영의 투명성, 주주가치 제고, 합리적의 의사결정 구조와 같은 지속가능 경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칼에 한국기업이 이사회 중심의 지배구조로 바뀔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단계적으로 기업이 변화할 수 있는 로드맵이 제시돼야 한다. 대주주와 장기 투자자의 동반자적 관계다. 대주주에게 안정적인 경영권을 인정해주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투자자가 요구하는 지배구조 투명화, 배당 확대, 책임 있는 투자정책을 수용한다. 이사회에는 ESG 전문성을 갖춘 인사를 참여시켜 절차적 정당성과 지속가능성 전략을 강화한다. 그 대가로 투자자는 단기적 투기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방패 역할을 하며, 장기적 가치 창출에 필요한 결단에는 힘을 실어준다.
물론 위와 같은 구조는 기업의 과두정(Oligarchy)이며, 그에 수반하는 리스크가 수반되므로 미봉책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대주주와 기관의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소액주주의 이익을 해칠 수 있고, 근본적인 체질 개선보다 단기적 주가 부양에만 매몰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적 지배구조를 향하여 단계적으로 전환하면서, 당장의 생존을 위한 현실적 선택을 해야하는 시점이다. 최대 시장인 미국과 중국의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데, 글로벌 공급망에 큰 변화를 주는 현지 생산기지와 대규모 투자는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상황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다. 인공지능(AI), 탄소중립, 산업·에너지 전환과 같은 굵직한 과제는 단기 실적에 연연해하는 의사결정자들이 결코 추진할 수 없다. ESG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숫자만 보면서 콩을 세는 '빈 카운터'(Bean Counter)들이 범접할 수 없는 기업가 정신과 도전만이 이런 장기 과제에 대한 결단을 내릴 수 있다.
또, 결단이 독단과 전횡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동시에 만들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민연금과 공적 연기금이 수탁자 책임을 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국민연금과 공적 연기금은 국민의 노후와 복지를 책임지는 장기적인 재무적 성과를 얻기 위해, 기업의 핵심 의사결정이 독단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의사결정에 균형을 유지하고, 지속가능하고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는 전략적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모델은 결코 완벽한 모델이 아니다. 그러나 무역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 기업들에겐 고도의 기업가 정신,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 전략적 판단이 필요하다. 이런 과두적인 체계는 한국기업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도약하는데 필요한 단계적 기업 지배구조 선진화, 고도화의 디딤돌이 될 것이다.
박용진 KIS자산평가 ESG사업본부장 yongjin.park@kisprici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