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F 외환위기 이후 보수는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정부, 진보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가 각각 세 차례 집권했다. 각 정당은 대통령 공약의 설계부터 국정과제 집행까지 다양한 경험을 축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을 앞두고, 실현 가능성과 재원 조달 방안이 뚜렷하지 않거나 현재 한국경제와 민생에 꼭 필요한지 의문이 드는 공약들이 반복되고 있다. 과거 여섯 정권의 경제공약 가운데 달성되지 못한 정책들을 살펴보면 세 가지 공통적인 문제점이 드러난다.
재원·실현성 안 따지는 공약 반복
정치적 잡음 더해지며 용두사미
소멸과 도약 갈림길 선 한국 경제
고부가가치 신산업 전략 나와야
첫째는 목표 설정의 과도함이다. 김대중 정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도입해 복지정책의 제도적 틀을 마련했지만, 매년 복지예산을 30% 이상 늘리고 최저생계비를 전면 보장하겠다는 약속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의 일자리 250만 개 창출, 이명박 정부의 747 공약, 박근혜 정부의 고용률 70% 달성,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1만원 공약도 마찬가지다. 공약은 캐치프레이즈가 아닌 실행 가능한 국가 운영의 로드맵이어야 한다.
둘째는 재원 조달 방안과 실행계획의 부실함이다. 역대 정부는 모두 수십만 호에서 많게는 100만 호의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약속했지만, 어느 정부도 그 약속을 완전히 이행하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의 농가부채탕감, 박근혜 정부의 기초연금 20만원 전면 지급, 문재인 정부의 공공일자리 81만 개 창출 공약도 비슷한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재원 조달 계획이 핵심인 이유는 고령화로 인해 현행 복지제도 유지만으로도 재정수요는 증가일로에 있고, 동시에 경기 침체에 따른 세입 감소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정치사회적 조율의 실패다. 노무현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장 유연화 등은 법적 준비 미흡, 정치적 갈등이나 사회적 반발로 인해 온전히 실행되지 못했다. 공약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실행 가능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진영 논리에 기대어 논쟁을 유발하는 공약은 오히려 국정 동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여기에 더해 외부 충격과 국내 변수들도 공약의 실현을 어렵게 만든다.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부동산 가격 급등, 부동산 PF 사태가 터지면 공약 달성에 집중할 추진력이 떨어지게 된다. 여기에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각종 정치 갈등으로 인한 잡음까지 더해지면 대통령 공약은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과 약해진 한국경제 체력으로 차기 정부의 정책 환경이 그 어느 때보다 험난할 것을 전제로 공약을 설계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공약이 실천되지 못하는 과정을 지켜봐 왔다. 그런데도 각 정당이 또다시 비현실적인 공약을 반복하는 것은 국민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거창한 캐치프레이즈가 아니라, 실행 가능한 계획과 집중력 있는 선택이다. 과거 실패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제한된 시간과 자원을 고려해 국가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단 한 가지 정책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지금 한국경제는 구조적 저성장과 경기 둔화라는 이중의 압력에 직면해 있다. 우리에게 구조개선이라는 수술을 받을 체력이 5년도 남지 않았다. 불과 5년 후면 인구 절반이 50대 이상이기 때문이다. 차기 정부가 우리 명운을 쥐고 있는 이유다. 한국경제는 수술받을 시간을 놓쳐서 서서히 소멸해갈 것인가, 마지막으로 수술을 받고 다시 도약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우선 응급치료를 통해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체력을 회복한 후, 수술을 진행하고, 장기적으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당장 취약계층과 영세자영업자에 대한 지원과 한미 관세 협상의 성공적 마무리를 통해 경기 하강의 충격과 경제의 불확실성을 완화하는 응급치료가 필요하다. 동시에 비효율적인 산업구조를 개선하고, 고부가가치 제조업과 인공지능(AI)에 과감히 투자해 체질을 근본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지금은 미국을 중심으로 현대판 신중상주의(neo-mercantilism)가 부활한 시대다. 기술·무역·안보가 긴밀히 연결된 복합 경쟁 구도 속에서, 실현 가능한 산업정책이야말로 이번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공약이 되어야 한다. 저출산, 양극화, 영세자영업자의 과잉공급, 과도한 사교육비, 의대 쏠림, 수도권 집중이라는 한국사회의 고질적 문제들 뒤에는 결국 ‘양질의 일자리 부족’이라는 공통된 뿌리가 있다.
양질의 일자리는 정부의 구호가 아니라, 경쟁력 있는 산업에서 탄생한다. 결국 이번 대선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공약은 단 하나다. 한국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전략 산업에 대한 국가적 투자, 고부가가치 제조업과 AI를 포함한 신산업 육성에 관한 계획이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