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님 페미세요? 우리나라 박살 날 상황인데 남녀 비율이 중요해요?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세요.” 경향신문 여성서사아카이브 채널 플랫에서 지난주 출고한 기사에 이런 내용의 댓글이 달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꾸린 정책 싱크탱크의 주요 보직자 65명 중 여성이 단 5명뿐이라는 내용의 기사였다. 일단 기자는 페미니스트인가. 기사를 쓴 후배에게 물어보니 “그럼 아니겠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다음으로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조금 더 길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수십년 동안 비슷한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든지,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든지, 지금 ○○○라는 거악의 집권을 막아야 하는데 고작 그런 문제로 발목을 잡느냐든지,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리겠다’든지…
플랫팀은 독자들에게 ‘이번 대선의 공약이 되어야 할 성평등 의제’를 모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모집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는데도 공란을 빼곡하게 채워 적은 의견들이 200건 넘게 들어왔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우선순위로 꼽은 의제는 젠더폭력 근절이었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된 여성은 ‘언론에 보도된 사례’만 181명이다. 이틀에 한 명꼴이다. 강력범죄 피해를 입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지 몰라도, 성희롱과 강제추행을 포함해 크고 작은 성폭력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어본 적 없는 여성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여성 당사자에게는 이 문제가 숲이고 해일인 셈이다.
채용이나 승진 과정에서의 성차별, 출산 후 돌봄 불평등으로 인한 경력단절 같은 ‘일터에서의 성차별’도 일하는 여성이라면 피해가기 어렵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1996년 가입한 뒤 성별임금격차 1위를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다. 남성이 100만원을 받는 동안 여성은 68만8000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 밖에도 해묵은 문제가 쌓여 있다.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6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임신중지권이 법으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거나, 인구 절반이 여성인데 장관 중에 여성은 20%도 안 된다거나. 이런 지적을 하다가 ‘너 페미냐’라는 사상검증 공격을 받게 된다거나.
그러니까 계속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급한 일 아니니 다음에 하자’고만 하면, 우리 차례는 대체 언제 오지? 수십년째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올라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항상 엘리베이터는 만원이고, 누군가가 ‘지금은 자리가 없어요. 더 급한 사람들이 많으니 기다리세요’ 하면서 눈앞에서 닫힘 버튼을 눌러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다가 내가 아직도 1층에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거다. 너 아직도 1층에 있었구나. 오래 기다렸겠네. 그렇지만 1층에도 천장도 있고 바닥도 있잖아. 예전처럼 추운 데서 비 맞는 것도 아닌데 그냥 당분간 더 거기 있어도 상관없지 않니? 조금만 더 기다려봐. 다음번에는 꼭 태워줄게. 이번에는 더 급한 일이 많아서. 기다리기 힘들면 의자 같은 거라도 하나 놔줄까?
민주당 대선 후보가 확정됐고 국민의힘도 곧 후보를 결정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성들의 요구가 응답을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국민의힘 경선 결선에 올라온 두 후보 중 하나는 비동의강간죄에 반대한다고 했다.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강요된 성관계 가해자를 강간죄로 처벌하기 어려운 현실이 지속되고, 이미 수년간 국제사회로부터 개정을 권고받고 있는데도 그렇다. 또 다른 후보는 이미 위헌 결정이 나온 군가산점 부활 공약을 들고나왔다.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자를 페이스북에 적었던 누군가가 떠오른다. 민주당은 ‘성평등’을 부각하지 않는 방향을 잡고 공약을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2022년 대선 막판 민주당에 표를 몰아줬고, 지난겨울 광장을 메우며 조기 대선을 이끌어낸 이들 중 압도적 다수가 2030 여성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기이할 정도다. 옳다고 생각하지만 ‘표 떨어질까 봐’ 언급하지 못하는 거라면, 젠더폭력과 성별임금격차와 성차별을 해소하는 것이 성별과 상관없이 모두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유권자를 설득하는 것도 정치의 영역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