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 때 우연히 참가한 수요시위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났다. 29세에 활동가가 돼, 매일 활동가로 살다 45세에 스톱. 그즈음 동고동락했던 활동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공황장애가 왔다. 할머니들 곁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았던 시간이 부정당하고 의심받고 있었다. 활동가가 아닌 나는 상상조차 한 적 없던 내 청춘을 통째로 상실한 듯한 슬픔을 느꼈다. 불면증약과 수면제, 항우울제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던 날들을 살아내고 49세에 다시 활동가로 돌아온 내게 누군가 물었다. “(활동가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요?”
“내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 있으면 손잡아주며 살고 싶어요.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는 성소수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교회. 그런 곳, 소외되고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그냥 함께 있고 싶어요. ”
나는 어쩌다 활동가가 됐을까?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불평등과 차별이 없고, 골고루 복되고 평화로운 나라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불평등하고, 누군가 억압받고,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고. 신학 공부하고 싶어서 신학대에 진학한 내게 날아오는 말은 “너 목사 사모하려고 신학교 왔지?” 여자 선배들이 교회에서 보조자 역할만 하는 모습도 불만스러워 여학생 운동을 하는 동아리를 기웃거리다 수요시위에 갔다.
처음에는 그냥 ‘할머니들이 계시는구나’ 했다. 그로부터 7개월 뒤 참여한 수요시위. 그날 시위에 참여하기로 한 여학생들이 시위가 시작되는 낮 12시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활동가가 전한 소식. “수요시위에 오기로 한 여학생들이 경찰들 때문에 안국역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할머니들의 반응.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 문제를 알릴 청년들이야.” “우리가 데리러 가자!” 할머니들이 경찰들을 헤치고 여학생들을 한 명씩 구해오는 광경을 목격하고, ‘내가 그 청년이 되고 싶은’ 소망이 생겼다.
수요시위에 종종 참가하다 할머니들의 증언을 통계 내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고, 그것이 계기가 돼 활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나름 할머니들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내가 잘 알고 있는 할머니가 하나도 없구나’. 그럼에도 활동가로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전국의 할머니들을 만나러다니며 덥석 해버린 약속 때문이다. ‘할머니 살아계실 때 일본 정부가 사죄할 수 있도록 우리가 열심히 할 테니, 할머니도 힘내세요.’ 할머니들은 철부지이던 내게 살아갈 의미도 주셨고, 사람에 대한 태도도 가르쳐주셨다. 세상을, 사람을, 사랑을. 고개 숙여야 할 때 고개 숙이는 법도 일깨워주셨다.
백수로 지낸 4년 동안 깨달은 것. ‘내 일상도 없이, 내 삶도 없이 활동가로만 살았네.’ 건강하게 활동하려면 생활과 일을 조화롭게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 또래나 선배 활동가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기억한다는 것? 우리 사회는 몇분의 할머니만 기억한다. 운동을 열심히 하신 할머니들, 증언을 열심히 하신 할머니들만. 우리가 잊고 있는 할머니들이 완전히 잊히지 않게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반성이 새삼 또 든다. 나 나름대로 할머니들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할머니들과 함께 지낼 때 내가 20~30대가 아닌 지금 나이(50세)였더라면 할머니들과 더 깊고 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요즘 내 화두는 욕심과 양심. 모든 죄악은 욕심에서 나오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심이 과해지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거나, 자각하고도 브레이크를 걸 타이밍을 놓친다. 양심은 나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거울 같은 것. 나를 씻어주는 물 같은 것. 욕심이 과해지면 그 욕심이 권력이 되고,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들)에게 폭력이 돼 돌아온다. 양심은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내 욕심이 과하지 않은지, 내 첫 마음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다보고 들여다보게 하는 것.
문득 내 양심이 던지는 질문. ‘나의 첫 마음. 할머니들에게 가졌던 첫 마음을 나는 그대로 가지고 있나?’
활동가? ‘누구나 될 수 있는 것. 자기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억울하고 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내 이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그 모든 사람이 진정한 활동가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