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돈침대 집단소송 승소 김태현 변호사

“현실적으로 질병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위자료를 인정하고 그 기준에 관한 법리를 처음으로 설시해 독성물질에 노출된 피해자 구제의 실효성을 도모했다.”
대법원이 지난 7월 3일 배포한 보도자료엔 한 사건의 판결 의의가 담겨 있었다. 여기서 언급된 ‘독성물질’은 방사성 물질 라돈. ‘피해자’는 라돈이 검출된 침대를 이용한 소비자들이었다. 이 문장은 2018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라돈침대 사건’ 집단소송의 대단원이었다. 7년 만에 법정 영화의 엔딩 자막 같은 결론이 나온 것이다. 피해자 5000여 명이 원고로 참여한 1심은 원고 패소(2023년 10월)였고, 2000여 명이 항소한 2심(지난해 12월)은 원고 일부 승소였다. 그 판결이 이날 확정된 것이다.
라돈침대 사건 7년 만에 1인당 200만~300만원 배상 판결 확정
대법 “독성 물질에 노출된 피해자 구제 실효성 도모” 의미 부여
김 변호사, 이름까지 바꾸며 난임 극복…출산 뒤 판결 뒤집어
“다른 사람 이롭게 하는 일 좋아…아들도 그렇게 키우고 싶어”

라돈침대 소송은 한 여성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소송의 시작과 끝에서 좌절과 성공의 롤러코스터를 탄 김태현(43) 변호사다. 지난달 26일 중앙일보에서 그를 만났다.
200명 예상했는데 5000명 참여
라돈침대 집단소송의 시작은 우연에 가까웠다. 2018년 5월 SBS 보도로 라돈침대의 위험성에 대한 걱정이 폭발했다. 공포감에 휩싸인 시민들이 자기 집 침대 매트리스의 브랜드를 확인하고 방사능 수치를 쟀다. 라돈 검출 매트리스를 쓴 소비자들은 인터넷 포털에 피해자 카페를 만들었다. 정부가 수거한 매트리스가 야적장에 쌓였다.

김 변호사의 지인이 피해자 카페 개설자의 가족이었다. 김 변호사는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해 일단 저지르는 심정으로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고 회고했다. 처음엔 원고가 200명쯤 될 거로 예상했다. 인터넷 카페 회원이 2만명으로 늘더니 5000여 명이 소송에 참여했다. 김 변호사는 일하고 있던 작은 법무법인에서 나와야 했다. 많은 피해자가 찾아오고 전화 문의가 쇄도했기 때문이다. 이후 유사 소송 경험이 있는 황경태 변호사와 뜻을 모았다.
‘도망자’에서 ‘개선장군’으로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2023년 1심 패소 판결은 뜻밖이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라돈침대의 인체 유해성을 인정한 상황이었는데도 서울중앙지법은 침대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침대 제조회사에 위법성과 과실을 인정하기 어렵고, 매트리스로 인해 신체에 위험이나 건강상 장애가 발생하는 등 손해가 발생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는 취지였다. 생활방사선에 대한 법망은 허술했다. 침대에서 측정된 방사성 물질(라돈과 토론)의 피폭선량이 생활방사선 안전기준인 연간 1밀리시버트(mSv)를 초과하는지에 대한 계산법도 모호했다. 1심 법원은 국가기관인 원안위가 실시한 유해성 조사의 신빙성을 의심했다. “몸에 좋은 음이온 발생을 위해 특수물질(모나자이트)을 사용한 것뿐”이라는 제조업체의 항변도 받아들여졌다.
이 판결로 김 변호사는 ‘도망자’ 소리를 들었다. 1심이 진행되는 동안 김 변호사는 경기도에서 2년여간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소송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일부 의뢰인들이 “변호사가 도망갔다”고 비난했다. 다시 소송에 합류해 판결을 뒤집으면서 명예를 회복했다. 2심 법원은 “제조회사가 모나자이트에서 방사선이 방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안전성 여부를 확인하거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 등을 취하였어야 함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대법원이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모나자이트의 위험성에 관한 아무런 검토도 없이 음이온의 막연한 효능을 강조하면서 매트리스를 판매했고, 소비자들은 방사선 노출 가능성에 대한 경고를 받지 못한 채 안전기준을 초과하는 방사선 피폭을 당해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고 판시했다.
항소 위해 수백 통 전화 돌려
극적인 역전승. 김 변호사는 “항소할 수 있게 피해자들을 설득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1심 도중에 왜 빠졌나.
“우연히 찾아온 공직에서 일할 기회를 잡고 싶었다. 패소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나로서는 오히려 상당한 성공보수를 포기한다는 생각이었다. 패소하니 ‘사기꾼’으로 몰리는 것 같았다.”
항소심 추진이 쉽지 않았을 텐데.
“황 변호사와 나눠서 피해자들에게 전화를 수백통 걸었다. ‘항소해야 하는 사건’이라고 설득했다. 밤늦게까지 전기난로를 켜놓고 온종일 전화를 돌렸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피해자들을 설득한 게 이 소송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1심 판결에 대한 생각은.
“라돈의 위험성을 인정한 원안위의 의견을 법원이 신빙성이 없다고 본 것은 오만한 판단이라 생각한다. 한국의 집단소송 1심이 그런 경향을 보인다. 2016년 애플이 기기 성능을 고의로 떨어뜨린 의혹에 대한 위자료 소송도 1심 패소, 2심 승소였다. 2심에서 1인당 위자료 7만원씩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는데, 6만명이었던 원고가 2심에서는 7명으로 줄었다. 같은 해 폭스바겐의 배기가스 조작 사건에서도 1심 원고 5000명은 패소했고, 항소심 원고 79명은 승소했다. 1심에서 패소한 소비자들은 대부분 항소심에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
소비자들이 더 불리한 것인가.
“한국은 입증 책임을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고 1심 법원도 소비자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한국 소비자를 ‘글로벌 호구’로 만들 우려가 있다. 소비자들은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막상 손해가 발생하면 그 질서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피해자 일괄구제, 징벌적 손해배상 등 해외 선진국의 집단소송제 도입을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대법원 판결에 만족하나.
“매트리스 한 개당 100만원의 위자료를 책정한 것은 문제가 있다. 같은 침대를 사용한 다른 가족에게도 위자료를 줘야 한다. 사람에게 귀속되는 위자료를 물건(매트리스)에 귀속시킬 수 있나. 또, 방사능 위험을 미연에 방지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에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지 않은 점도 아쉽다.”
수억원대 성공보수 받을 듯
판결에 아쉬움을 나타냈지만, 김 변호사가 한국산 침대의 안전성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한 건 분명하다. 그 역시 뿌듯함을 느끼는 듯했다. 김 변호사는 “한 사람으로 인해 이후 여러 사람의 삶이 바뀌게 되었다는 기록을 남길 수 있으면 굉장히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홍익인간’이란 말도 장난처럼 자주 사용했다. 이번 승소로 ‘널리’ 뿐만 아니라 본인도 이롭게 했다. 성공보수가 수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배상금은 얼마 정도인가.
“위자료 100만원, 매트리스 가격, 지연 이자 등을 합쳐 피해자 1인당 200만~300만원 정도를 받게 된다. 16개의 소송이 확정되거나 화해조정이 됐다. 2심 원고가 약 2000명이니 총액은 40억원이 조금 넘는다.”
침대회사가 문을 닫았는데 돈을 받을 수 있나.
“소송을 제기할 때 회사 소유 수백억 원대 부동산에 압류를 걸었다. 판결이 확정되자 피고 측이 먼저 연락을 해와 배상금을 입금했다. 원고들이 소송인지대 2만원을 송금했던 그 계좌들로 돈이 들어오고 있다.”
기분이 어떤가.
“무엇보다 사기꾼이라는 오명을 벗었다는 게 좋다.(웃음) 기업들에 경각심을 남긴 것도 다행스럽다. 침대회사의 고의가 아니더라도 소비자에게 피해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을 방치한 것은 가벼운 잘못이 아니다.”
엄마가 되고픈 기도, 개명
이번 판결엔 또 하나의 반전코드가 있다. 1심 판결문에 적힌 김 변호사의 이름이 ‘태현’이 아니라 ‘지예’라는 점이다. 옛 김지예 변호사는 지금도 유튜브 검색이 될 정도로 나름 셀럽이었다. 방송 패널로 자주 나왔고, 2019년 MBC 100분 토론에선 ‘고위직 여성채용할당제’를 주장했다. 당시 이준석 바른미래당 최고위원(현 개혁신당 대표)과 찬반 논쟁을 벌여 화제가 됐다. ‘페미 여전사’로 찍혀 ‘이대남’들의 맹공을 받기도 했다. 공적 영역에 관심이 커 정치권에서도 일했다. 2017년엔 안희정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 대선 캠프에 참가했다. 그의 성폭행 의혹이 터지자 미련 없이 그를 떠났다. 이재명 경기지사의 눈에 띄어 2020년부터 경기도청 공정경제과장과 공정국장으로 2022년 7월까지 근무했다.
‘재산’과 다름없는 이름은 왜 바꿨을까. 엄마가 되고 싶어서였다. 2016년 IT엔지니어인 남편과 결혼한 김 변호사는 난임을 겪었다. 시험관 시술 등이 실패하면서 2022년 12월 ‘이름을 바꿔보라’는 주변의 조언을 듣게 됐다. 김 변호사는 “바보 같은 짓이라 생각하면서도, 기도하는 심정으로 개명을 감행했다”고 말했다. 그 덕분인지 알 순 없지만, 2023년 임신에 성공했고 지난해 5월 아들을 출산했다. 그로부터 7개월 뒤 라돈침대 소송도 이겼으니 복덩이를 낳은 셈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 대차게 맞섰던 여성으로서, 아들을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 궁금했다. 먼저 김 변호사는 “이대남들의 고충은 남자로서의 고충이라기보다는 20대 전체의 고충이다. 다수자가 폐쇄적인 커뮤니티에 갇혀 자기들만 억울하다는 주장에 함몰된 것이고 정치가 잘못된 생각을 부추겼다”고 진단했다. 이어 “그래서 아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이고 공익적인 자세로 바라볼 수 있게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김태현(43) 변호사=수원 효원고와 이화여대 법학과(01학번)를 졸업하고 2010년 5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김지예라는 이름으로 TV에서 법률전문가 패널로 자주 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의 선거 캠프에 참여했고 이재명 대통령이 경기지사일 때 경기도 공정국장으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