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죄’ 두 글자를 위해 앞만 보고 살아왔는데, 막상 선고받고 나니깐 허망하고 씁쓸하기도 합니다.”
61년 만에 성폭행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인정받은 최말자(78)씨의 소회다. 최씨는 10일 부산지법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된다”며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판사로부터 사과는 받지 못했다. 최씨는 선고 직후 “61년 전 선고에 대해 해명이든, 사과든 해야 했는데 (판사가) 그런 말 없이 무죄를 선고했다”며 “절차가 아닌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최씨는 이날 오후 2시 30분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 환영 기자회견’을 열고 1시간가량 소감을 밝혔다. 하얀색 투피스에 진달래꽃을 연상케 하는 진분홍색 재킷을 입은 최씨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2020년 5월 6일 재심 청구 이후 5년 4개월 만에 ‘성폭력 정당방위’를 재심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성과를 끌어낸 여성인권운동가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최씨 “검찰 무죄 구형 후 만감 교차…피해자 인권회복에 힘쓸 것”
그는 지난 7월 23일 재심 1차 공판에서 검찰이 무죄를 구형하자 만감이 교차했다고 했다. 법정에서 검사는 최씨에게 ‘사죄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최씨는 “검찰 구형 이후 며칠 동안 ‘내 인생은 뭔가? 보상을 받는다면 어떤 게 있을 수 있나’를 곰곰이 생각했다”며 “보상을 받게 되면 ‘한국여성의전화’를 비롯한 지인들과 함께 성폭력 피해자 인권 회복에 힘써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초졸인 최씨는 배움에 늘 목말라했고, 2013년 3월 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에 입학하면서 세상에 눈을 떴다고 했다. 최씨는 “성폭력을 당하던 당시 18세 소녀는 세상 물정을 몰랐지만, 방통대에 입학하면서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며 “이 사건을 묻고 갈 수 없으니 끝까지 죄인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생각으로 2018년 한국여성의전화 문을 두드렸다”고 말했다.
2년간의 상담 끝에 2020년 5월 재심 청구를 했지만 1심, 2심 모두 기각되고 대법원은 3년 넘게 심리를 벌이는 등 좌절의 연속이었다. 2023년 5월 대법원 앞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를 호소하는 1인 시위도 벌였다. 이때 앞니 6개가 빠질 정도로 힘에 부쳤다고 했다. 최씨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고, 힘이 되고 용기를 줘서 끝까지 싸울 수 있었다”며 여성단체와 지인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최씨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 준비 중…“성폭력 처벌 강화되길”
무죄 선고를 받은 최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준비 중이다. 최씨의 변호를 맡은 김수정 변호사는 “최씨가 국가기관에 당한 위법한 행위에 대해 손해배상과 형사 보상 청구를 진행해 국가가 져야 할 책임에 대해 추궁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이번 판결로 대한민국 법이 바뀌었으면 한다는 뜻도 전했다. 그는 “현재도 성폭력 사건이 넘친다”며 “법원이 가해자에게 무거운 엄벌을 내려달라고 부탁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최씨는 힘이 닿는 한 자신과 똑같은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 회복 활동을 위해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말로 기자회견을 마쳤다.
앞서 1964년 5월 6일 최씨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노모(당시 21세)씨의 혀를 깨물어 1.5㎝가량 절단한 혐의로 부산지법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검찰은 최씨를 중상해(혀 절단) 혐의로 그해 7월 구속했고, 최씨는 6개월을 구치소에서 살다 출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