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회담·베트남 파병…'격동의 한국' 10만컷 남긴 日사진가 [한·일 수교 60년①]

2025-06-16

한·일이 거쳐온 60년은 파란과 곡절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반일’과 ‘혐한’을 넘어 이제는 양국 국민 교류 ‘1200만 명 시대’라는 반전의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 놀라운 서사의 싹을 틔운 이들은 다름 아닌 한·일 양국 국민이었다. 갈등과 반목을 넘어선 양국 국민의 ‘인연(絆)’을 통해 한·일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88)는 1965년 한·일 수교 직전 한·일 회담 반대 시위 취재를 시작으로 지난 60년간 한국을 100번도 넘게 찾으며 10만여 컷이 넘는 사진을 남겼다.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르는 그를 지난 4일 도쿄 고토(江東)구 자택에서 만났다.

“아리랑을 들으면 설레요.”

렌즈 하나로 한국의 60년, 격동의 현대사를 기록한 그는 덥석 ‘아리랑’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한국과 바다를 맞대고 있는 시마네(島根)현 쓰와노(津和野)의 한 산골 마을에서 1936년에 태어났다. 도쿄농업대 농업공학과에서 네 살 위 한국인 유학생 박모씨를 만난 것이 첫 인연의 시작이다. 1학년 첫 여름방학, 박씨와 함께 고향 마을로 갔다. 어느 날 밤, 친구가 ‘비밀’을 털어놨다. 1952년 6·25 전란 속에서 완도에서 어선을 타고 밀항해 들어왔다는 거였다. 방학이 끝나고 돌아와 그는 친구로부터 아리랑을 배웠다. 언젠가 한국을 한번 가봐야지 생각했다. 한국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야학으로 도쿄종합사진전문학교를 다니면서 보도 사진가의 꿈을 꿨다. 데뷔작은 수은 중독에 의한 공해병인 미나마타병(水俣病)으로, 1963년 일본사진비평가협회 신인상을 받았다. 이듬해 한국 취재에 나섰지만, 수교가 돼 있지 않으니 비자 얻기가 힘들었다. 그때 주일 한국대표부(현 주일 한국대사관)를 통해 힘을 보탠 이가 친구 박씨다. 어렵사리 비자를 받아 그해 8월 3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27살의 그가 조우한 것은 먼지투성이의 비포장 도로였다.

“그때만 해도 공항 세관에서 사람들이 일본어로 대응을 해줬다. ‘두유 스피크 잉글리시(Do you speak English)’가 아니었다. 식민지 시대의 잔영이었다.”

그가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은 1965년 봄의 일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수교를 위해 한일회담을 이어오고 있었다. 군사 정권이 추진하는 수교 논의에 당시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대 시위가 잇따랐다. 최루탄이 날아들고, 진압대가 학교에 진입해 군용 트럭에 학생들을 연행해갔지만,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촬영을 돕던 지인이 그에게 “일본어를 쓰지 말라”며 한국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했다.

촉촉한 비가 내리던 그해 4월 19일. 그의 렌즈는 학생 시위대를 향했다.

“앞선 시위에선 돌이 날아들고 격렬한 시가전이 펼쳐졌던 것과 다르게 모든 학생이 ‘무언(無言) 데모’에 나섰다. 고려대에서 시작한 행진은 서울 시내로 이어졌다.”

빗속에서 눈물을 삼키며 전진하는 시위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의 렌즈로 포착한 것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한일회담 침묵시위’다.

“학생들의 조약 반대는 식민지 시대 35년에 대한 반감에서 나왔다. 학생들이 굴욕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본다.”

그해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조인식이 지나고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출발을 앞두고 여의도에서 맹호부대 파월 퍼레이드가 열렸는데, 군악대가 아리랑을 빠른 박자로 연주했다. 그는 “퍼레이드가 끝나고 면회가 이뤄졌는데, 부모와 자식 간의 이별식이었다. 지금도 행진곡 같던 그 아리랑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이후로 이어진 한국의 시간들은 그를 카메라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했다. 광주항쟁 등 민주화의 파도가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치 문제는 어느 나라나 있지만, 민주화는 중요하지 않나. 한국은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모두 이뤄냈다. 깜짝 놀랐다”고 회상했다.

한국은 그에게 또 다른 인연을 내줬다. 배필 최화자(80·일본명 구와바라 가즈코)씨다. 1969년 6월 11일의 일이다. ‘빨리빨리’ 하루가 다르게 돌아가는 한국의 경제를 카메라에 담기로 했다. 토요타 자동차와 기술 제휴해 인천시 부평에서 승용차를 만들던 신진자동차를 찾아갔다. 일본어를 잘하던 최씨가 안내를 맡았는데, 그만 한눈에 반했다. 비원에서 사진을 찍어주기로 하고 나흘 뒤 두 사람은 다시 만났는데, 그는 수첩에 그 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멋진 한국 여성. 처음으로 알게 된 교양 있는 여성.”

일본으로 돌아갈 날짜가 잡히자 그는 일대의 결심을 한다. 프러포즈였다. 난데없는 결혼 신청. “돌아가면 후회할 걸요!”란 답을 듣고는 비행기에 올랐다. 곧바로 구애가 시작됐다. 사진을 보내고, 지인 편에 선물 공세를 마다치 않았다. 무려 1년 5개월, 두 사람은 절절한 편지 연애 끝에 결혼을 결심한다. 1970년 11월, 한국서 결혼식을 올리고, 일본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국내 한 잡지에 일본 유명 사진작가가 한국인 아내를 맞는다며 ‘결혼식은 서울서 첫날밤은 도쿄서’라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북한과 판문점, 불모지에서 배를 건조한 한국 조선의 신화, 외환위기와 대선까지 동분서주하는 그를 지탱해준 건 아내였다. 최씨는 “결혼 직전, 부모님이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할 정도였지만 남편의 한국 사진전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좋은 사진을 앞으로도 찍어야 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내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그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냐’고 묻자 주저 없는 답이 돌아왔다.

“시마네가 일본 고향이라면, 한국은 제2의 고향이다.”

구와바라씨가 아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난 60년간 한국을 찍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아내뿐 아니라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한국과 일본은 형제처럼 닮은 것이 많다. 앞으로 한·일 관계는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 친구가 되면 된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

아내 최씨가 거든다.

“한국 노래, 드라마를 좋아하는 일본인이 많을 정도로 일본은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인 역시 일본을 많이 찾고 좋아한다. 서로 이렇게 좋아하는데 정치가 이를 갈라놓곤 해서 안타까운 적이 많다. 한·일 수교 6주년을 맞은 지금 옛날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왕래하며 오랜 우호 관계를 지속했듯 이제부터는 더욱 활발한 평화 외교와 문화 교류가 이뤄졌으면 한다.”

구와바라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남북통일을 마지막으로 찍고 싶다”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들이 분단 국가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언젠가 반드시 통일된다는 생각을 가져주길 바란다. 독일 역시 전쟁이 아닌 방식으로 통일을 이뤘다. 불가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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