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7년 2월 27일 국내 최초의 스카우트 우표가 발행되었다. 자주·보라색 2종으로 단원의 모습과 태극 문양, 발상지인 영국 스카우트 창설 50주년 디자인을 담고 있다. 도안자는 필자의 외조부 이태환이다. 그는 '105인 사건' 옥고 후 미국으로 망명, 흥사단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그의 아버지 이일(이용혁)과 같은 루트로 망명했다. 이태환은 퍼듀대 입학 전 제퍼슨 고등학교에서 수학하던 하루는 스카우트 캠핑을 목격하고 참여 의사를 밝혔지만, 미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대신 체험해보라며 준 텐트 속에서 눈물로 날밤을 지새우며 언젠가는 독립된 조국에서 당당히 야영하리라 다짐했다. 해방 후 시작한 스카우트 재건 노력은 6·25 직전 경성전기회사 이사장이 돼서도 이어졌다.
1952년 말 그는 일본 잼버리 참관 중이던 국제연맹 사무총장 월슨(J. S. Wilson)에 한국 스카우트의 회원국 가입을 부탁하기 위해 오선환(기업·교육가)·김창호(목사)와 김해공항을 출발했다. 일행은 일본 하코네 후지야 호텔에 숙박 중인 윌슨을 만나 취지를 설명했고 1953년 1월 마침내 가입이 성사됐다. 같은 해 런던 근교 길웰파크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드 배지'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서삼릉 '중앙훈련원'은 우리도 이 같은 캠프장이 필요하다고 느낀 그가 아시아 재단의 지원과 정부 무상 임대로 이룬 결실이다.
최초의 스카우트 해외 원정(1955년·단장 주원기)이 이루어진 다음 해 3월과 7월 이태환은 미국 원정을 이끌었다. 미 함정을 이용한 2차 원정 때 시카고 위네카의 '스카우트우표국제협회(1951)' 창립자 쏠슨(Harry D. Thorsen, Jr) 집에 머물며 우표를 디자인했다. 이때 쏠슨에 이승만 대통령과 체신부 장관에 재해·전쟁서 봉사한 한국 스카우트를 기리는 우표 발행의 당위성을 알리는 편지와 책자 '세계의 스카우트 우표'를 보낼 것을 제안했고 이 방식은 각국의 교본으로 자리 잡았다. 로터리클럽이 1949년 3월 국제무대에 서게 된 것도 선교사 피치(G. A. Fitch)와 국제로터리 총무 민스(G. Means)의 협조를 끌어낸 이태환의 노력 때문이었다. 스카우트 원정대는 에번스턴에 있는 국제본부에 한국을 상징하는 80kg의 육중한 석판을 운반·설치했다. 동반한 오선환이 이태환을 평생 멘토로 따르며 스카우트·로터리클럽에서 봉사하게 된 연고다. 방미 중에는 조카로, 훗날 미세수술 세계 권위가 된 이선(이실흥) 박사와 퍼듀대 물리학과 종신교수 김영일도 만났다.
2차 원정 때 동행한 한국과 일본 스카우트의 충돌을 우려한 미 해군은 단원 간 분실을 제안했지만, 이태환은 단원들에 결정을 일임했고 항해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백병전서 스카우트 경례를 한 채 기절한 미 병사를 치료해준 일본 병사의 일화로 국경을 초월한 스카우트 인애(仁愛)를 강조했다. 나라 사랑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우표란 기념이자 역사야. 독도 3종 세트 우표. 이거야말로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인 고증이지.”
이내찬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nclee@han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