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소화기’…인테리어가 생명을 가린다

2025-11-06

경기도 주요 백화점들이 ‘고급 인테리어’를 이유로 소방시설을 시야에서 감추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벽과 동일한 색으로 칠해진 소화기와 소화전, 흐릿하거나 없는 안내 표식은 화재 발생 시 초기 대응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6일 경기신문이 수원·용인·화성 등 경기 남부권 주요 백화점과 아울렛 19곳을 점검한 결과, 대부분 매장의 소화기와 소화전이 회색이나 흰색으로 도색돼 눈에 띄지 않았다. 인테리어의 일부처럼 보이는 소방설비는 화재 시 누가 봐도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화성 롯데백화점 동탄점에서는 소화전이 벽면 색상과 동일한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소화기는 벽면과 같은 색의 팻말로 가려져 있었다. 멀리서 보면 인테리어 장식처럼 보여, 비상상황에서 누가 봐도 찾기 어렵다. ‘소방시설의 인테리어화’ 현상은 다른 지역 백화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용인 롯데프리미엄아울렛 기흥점에서는 안내판만 있고 실제 소화전이 설치되지 않은 사례가 37건에 달했다. 백화점 측은 “설계 단계에서 구조 변경이 있었다”고 해명했지만, 현장에서는 근거를 찾기 어려웠다.

고양 롯데백화점 일산점에서는 하역장의 소화기가 물건에 가려져 있었고, 상품적재금지구역에는 각종 박스와 캔 더미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AK플라자 수원점은 방화셔터 라인에 진열대가 세워져 있었으며, 소화기 안내판 자리에는 정작 소화기가 없었다. 일부 비상구는 잠겨 있거나 물건으로 막혀 있었다.

김포 현대프리미엄아울렛 하역장에서는 소화기가 쓰레기와 함께 바닥에 방치돼 있었다. 관리 사각지대에 놓인 백화점 하역장은 적치물과 폐기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비상구를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이 같은 인테리어와 관리 부실 구조에서는 불이 나면 초기 진화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소화기가 보이지 않으면 누구도 손에 잡을 수 없고, 표식이 사라진 비상구는 연기와 어둠 속에서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정전이 발생한다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데, 벽면과 같은 색깔의 소화기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1분의 대응’이 생사를 가르는데, 백화점의 미적 설계는 그 1분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현장 취재 기자는 “벽이 너무 깔끔해 소화기가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직원이 있었다”며 “표식이 없으면 평소에도, 화재 때도 찾기 어렵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인테리어는 미학이 아니라 안전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 소방 전문가는 “고급 매장일수록 인테리어와 안전설비를 분리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소화기와 소화전의 위치·색상·조명 반사율까지 설계 단계에서 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국내 백화점 화재사고의 상당수는 ‘표식 미비’와 ‘소방설비 접근 불가’로 초기 대응이 지연된 경우가 많다. 대형 유통시설 특성상 불이 한 점포에서 발생하면 순식간에 복도와 천장을 타고 번지기 때문에, 고객 대피보다 빠른 소화기 접근이 생명선이 된다.

유동 인구가 많은 백화점에서 불이 나면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평소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만 이용하던 고객들이 비상계단의 위치를 한눈에 찾기 어렵다는 점도 위험 요소로 꼽힌다.

다가오는 소방의 날(11월 9일)을 앞두고 실시된 이번 실태조사는 ‘보이지 않는 안전’이 곧 ‘보이지 않는 위험’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안전의 본질은 눈에 띄는 데 있다. 전문가들은 “예쁜 인테리어보다 먼저 보여야 할 것은 생명”이라며 “백화점 디자인이 생명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경기신문 = 박진석·장진·안규용 기자·방승민 수습기자·황민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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