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량한 벌판을 경비병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데 뭐 하는 거냐”고 묻자, 경비병은 “잘 모릅니다. 그저 명령을 따를 뿐”이라고 답했다. 알고 보니 오래전 어떤 여왕이 꽃밭을 순찰하라고 명령했고, 시간이 흘러 여왕과 꽃밭은 모두 사라졌는데 ‘명령’만 남은 것이었다. 영국 작가 엘리너 파전이 동화의 형식으로 불합리한 행정을 비판한 이야기다.
우리나라에도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도입돼 110년이 넘은 제도가 있다. 중요한 계약이나 행정절차를 거치려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인감’이다. 인감증명서만 있으면 신원과 의사 확인이 모두 가능하니 일견 편해 보인다.
그런데 증명서를 발급받으려면 인장을 준비하고 인감을 등록해야 해서 번거롭다. 주소지가 바뀌면 담당 공무원이 바뀐 주소지 관할 주민센터로 인감대장을 보내야 해서 관리도 쉽지 않다. 재산권과 관련,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 가족이나 주변인이 부정 발급하거나 제출할 우려도 있다. 인감증명서는 아주 중요한 개인정보를 담은 서류인 만큼 제출을 요구하는 수많은 행정사무에 타당한 근거는 있는지에 대해서도 따져볼 필요도 있다.
행정안전부는 2023년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중앙 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실시, 총 2608건의 인감증명서 요구 사무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중 295건은 자동차 신규 등록, 식품관련업 영업신고, 옥외광고물 신고 등 법령상 인감증명서를 요구할 근거가 없는 사무임에도 지자체에서 관행처럼 요구하고 있었다. 지식재산권 활용권 동의 신청, 자동차 폐차 요청 등을 포함한 1858건은 관계 법령에 근거는 있지만, 인감 필요성이 높지 않은 사무였다.
이에 행정안전부는 올해 6월까지 약 2년 동안 인감증명 요구 사무의 약 83%에 달하는 2153건에 대해 요구를 폐지하거나 본인서명사실확인서같이 간편한 방법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개선해 국민 불편을 크게 줄였다. 그만큼 행정력도 절약됐다. 절약된 행정력은 재난 대응, 취약계층 지원, 주민 안전 점검 같은 국민 생활과 직결되는 업무에 더 쓰이게 됐다. 앞으로도 인감증명 요구 사무를 지속 정비하고, 신설 민원사무의 인감증명 필요 여부도 엄격히 검토할 것이다.
황량한 벌판을 순찰하는 경비병을 마을이나 국경에 재배치하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촘촘하게 지키고, 국민 불편도 더 적극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 행정은 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행정안전부는 국민 눈높이에 맞춰 다양한 행정 영역에서 체감도 높은 정부 혁신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