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미용실 소년은 어떻게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었나

2025-08-03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작가, 2021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2024년 아트리뷰 ‘Power100’ 19위. 지난 10년 사이 세계 미술계에서 급부상하며 우뚝 선 예술가가 있다. 마크 브래드포드(Mark Bradford)다.

브래드포드는 196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사우스센트럴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91년 30세 되던 해에 캘리포니아 예술대(CalArts)에서 공부를 시작해 97년 석사 과정을 마쳤다. 90년대 후반까지 그는 어머니의 미용실에서 미용사로 일하며 창작을 병행했으나, 현재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추상화가 반열에 올랐다. 그의 표현을 빌면, "이젠 작업에만 열중해도 되고, '연로한 어머니는 누가 돌보지?'라는 고민을 안 해도 되는" 성공한 예술가다.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브래드포드의 개인전(‘Mark Bradford: Keep Walking’)이 지난 1일 개막했다. 브래드포드의 국내 첫 개인전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20여 년 작업을 집약해 보여주는 회화, 영상, 설치 작업 등 40여 점을 선보인다.

브래드포드는 독특한 방식으로 작업한다. 거리에서 수집한 전단지, 신문지, 포스터 등을 겹겹이 쌓고 광택제의 일종인 바니시와 래커, 물감으로 표면을 칠한 다음 표면을 찢고, 파고, 때로는 그 표면에 끈, 철사, 로프 등 다른 재료를 더한다. 기법도 유별나지만, 작품에 역사와 인종, 계층, 권력과 불평등에 대한 통찰이 녹아 있어 그의 작업은 '사회적 추상화(Social Abstraction)'라 불린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것은 약 600㎡(약 180평) 규모의 전시장에 깔린 거대한 설치 작품 ‘떠오르다(Float)’(2019)이다. 작가는 작업실 주변 거리에서 수집한 전단지, 광고 포스터, 신문지 등을 긴 띠의 형태로 자르고 노끈으로 이어 붙여 전시장 바닥 전체를 덮었다. 여기서 관람객은 작품을 '보는' 게 아니라 '걷기'로 경험해야 한다. 이곳을 지난 후엔 미용실에서 파마할 때 쓰는 반투명의 파마 종이(엔드 페이퍼)로 만든 거대한 추상 작품을 만난다. 지난달 31일 미술관에서 그를 만났다.

파마 종이를 재료로 쓰기도 했다.

이 종이는 나의 내부, 말하자면 작업실 안의 세계와 바깥 세계를 연결하게 해 준 특별한 재료다. 이 연작을 통해 내가 사회 경험으로부터 가지고 온 언어를 어떻게 추상과 결합할 수 있는지 익혔다.

전단지, 포스터 등 흔한 재료를 썼다.

내겐 재료에 담겨 있는 흔적과 기억이 중요하다. 내 작품을 보는 관람객이 이 작품의 재료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생각하며 봐주기를 바란다.

그의 작품은 의미 없이 그냥 펼쳐진 것은 하나도 없다. 파마 종이로 작업한 '파랑'에서 겹쳐진 지도와 신문지는 지도로 나눠진 구역에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역사를 은유한다. 도시 벽에 광고지가 몇 년 동안 겹겹이 쌓인 것을 뜯어와 거대한 제단화처럼 설치한 '명백한 운명'(2023)이라는 작품도 있다. 작품엔 '조니가 집을 삽니다(JOHNNY BUYS HOUSES)'라는 광고 문구가 보인다. '현찰 급하신 분'을 찾아 취약 계층으로부터 주택을 사들이는 투기 자본의 현실을 소리 없이 증언한다. 기차 시간과 지명이 흐릿하게 드러난 '기차 시간표' 연작은 20세기 초 중반 인종 차별을 피해 이주한 600만 명 흑인들의 '대이주'를 추상적으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2주 전에 한국에 들어와 전시를 준비한 그는 "이태원 거리를 걸어도 내 관심은 온통 거리의 작은 가게들과 그곳에서 일하는 소상공인이었다"며 "문을 열고 들어가 의료 보험은 어떤지, 살기는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들이 바로 '마이 피플(my people)'"이라는 얘기였다.

추상을 택한 이유는.

모든 것을 형상을 통해 직접 묘사하거나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내겐 예술가로 살아가는 기쁨도 중요하다. 내 작업을 '사회적 추상'이라고 부르는데, 엄밀히는 '사회적 기억을 다루는 추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회적 기억이 왜 중요한가.

늦은 나이에 예술학교에 입학하기에 앞서 나는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내가 겪은 것을 나와 분리하거나 마치 내가 다른 존재인 것처럼 삭제하고 싶지 않다. 경제적인 어려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사람들의 바람, 여성 혹은 성 소수자들이 처하는 불평등과 같은 일들이 모두 권력과 관계돼 있고, 하나로 연결돼 있다.

뒤늦게 대학에 진학했는데.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며 '예술'이나 '예술가'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대학 교육이라는 것은 미용실 손님들 대화를 통해 접하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스물여덟 살이었다. 대학이라도 나오면 미술 교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칼리지 예술 프로그램에 등록한 게 시작이었다.

그는 2014년 LA 남부에 예술·교육 재단 'Art + Practice(예술+실천)'를 설립해 청소년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유를 물으니 "나랑 비슷한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창조적이고, 아직 나이가 어리고, 부끄러움이 많고, 내성적이고, 트라우마를 겪은 친구들에게 '그렇게 주눅 들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미술계는 백인과 중산층 중심으로 돌아가며, 그들이 만든 룰로 유지되고 있다"며 "어려운 계층의 청소년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갇히지 않고, 예술을 체험할 수 있게 지역의 미술관 연계 프로그램이 더욱 다양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주목받는 작가로서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다.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는 그는 "예술가들도 어떤 작업을 하면 더 똑똑하게 보일지 고민하다가 자신을 망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로 뭘 만들고 싶은지 묻고 또 물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 2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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