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3일 남았다. 해방 80년의 역사에 어느 날인들 평온했을까만 참으로 숨가쁘게, 아니 숨죽이며 바라봐야 할 운명의 날이 이제 3일 앞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체념이 안개 깔리듯이 엄습하는 이 시간에 이런 절규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그래도 천도(天道)라는 것이 있다면 그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다시 외쳐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성군을 기다림이 아니다. 해방 80년 동안 전국(戰國)시대 100년 가운데 8부 능선을 넘었으면, 기다릴 만큼 기다린 것이니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다려 봄 직한 탓인지, “평화가 오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평화롭다, 평화롭다’고 말한다.”(『예레미아서』 6 : 14; 8 : 11) 우리는 전쟁도 없고 다툼도 없는 시대가 오기를 기다릴 만큼 어리석지도 않고 순진하지도 않다. 그러나 겪을 만큼 겪은 세대인 우리로서는 이제 다리 뻗고 등 펴고 살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낫기를 기다리는 것은 허욕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제보다 오늘이 더 어둡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추울 것이리라는 절망감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선거는 독종이 이기는 진흙탕 싸움
표만 보고 마구 지르는 우리 정치
‘그 나물에 그 밥’이라 체념했지만
마지막 희망 갖고 기대할 수밖에

문제는 공명선거와 국민의 지혜로운 선택인데 그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 고무신이 현찰로 바뀌었을 뿐, 선거는 여전히 타락하고 있다. 민주정치가 최선의 정치가 아니며, 그 꽃이라 할 수 있는 선거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에 버금갈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참고 기다리며 그 차선의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25만원에 영혼을 사고팔 만큼 더 교활해졌을 뿐이지 본질에서 더 좋아진 것은 없다. 결국에는 제 닭 잡아먹는 줄을 왜 모르랴만, 현찰의 즐거움이 양심을 압도하고 있다.
1860년대,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형식적으로나마 흑인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지만, 온갖 비리가 많았다. 흑인에게는 면접이라는 이름으로 “영국 국왕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거나, 인두세(주민세) 영수증을 보여 주어야 투표할 수 있었다. 남부의 한 주에서는 공화당 의원이 이런 허점을 파고들어 흑인의 인권을 표방하면서 선거전에서 앞서 나갔다. 이에 당황한 민주당 후보는 저명한 악극단을 데리고 와 공연을 했는데, 흑인에게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 대신에 인두세 영수증을 받았다. 세금 영수증이 없어 투표를 못한 흑인들은 투표 당일에 가서야 자기들이 속았음을 알았지만 구제할 방도가 없었다.
선거란 막 나가는 독종이 이기는 진흙탕이며, 깨끗하게 지는 것보다는 더럽게 이기는 것이 유리하다는 정치 공학을 가장 깊이 인지한 사람은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Marcus Cicero)였다. 그는 수재였다. 그가 어린 시절에는 천재란 어떻게 생겼나를 보고자 학부모들이 교실 밖에서 기웃거렸다. 그는 역사·철학·법률·문학·수사학을 통달하였으며, 청년 시절에 변호사가 되어 엄청난 돈을 벌었다. 재판이 진행 중이라도 수임료를 더 주면 피고에서 원고로, 원고에서 피고로 거리낌 없이 자리를 바꿨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빈정거리면 “내 변론으로는 그러고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호언했다. 그의 변론으로 산 의뢰인보다 죽은 피고가 더 많았다.
정치인은 모름지기 부동산에 밝아야 한다고 확신했던 키케로는 로마 시내의 큰 덩이 토지의 주인과 시세와 면적을 모두 외고 있었다. 부동산 개발로 모은 그 막대한 재산과 재주로 집정관이 된 키케로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국부”의 칭호를 들었다. 그는 로마의 현자 세네카(Lucius Seneca)의 말, 곧 “이득을 본 자가 범인이다(is fecit, cui prodest)”라는 말을 남의 일처럼 자주 썼다. 그의 비리는 끝내 옥타비아누스에게 적발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를 처형할 책임자는 그가 변론하여 살려준 포필리우스였고, 그를 밀고한 사람은 그의 제자이자 해방 노예인 필롤로구스였다. 나중에 정권을 다시 잡은 키케로의 아내는 필롤로구스에게 “네 살을 베어먹는 것으로 연명하라”는 평결을 받아냈다.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우리의 형편을 살펴보면 많은 유혹이 손짓하고 있다. 표만 되는 일이면 마구 내지른다. 민중은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받아먹고 바로 찍으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돈 먹고 바로 찍은 국민이 있다는 사실은 아직 학계에 보고된 바가 없다. 밀(J. S. Mill)이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결국 먹은 무리는 제 살을 베어먹는 결과에 다다를 것이다.
문제는 우리 자식들이다. 왜 우리 자식들은 짓지도 않은 일로 벌을 받아야 하고 조상이 지은 죄로 삼대까지 고통을 겪어야 하나(『예레미아서』 31 : 29)이다. 이미 죽고 없어진 조상들을 향하여, “죄를 지은 선조들은 이미 없는데 저희가 왜 그들의 죄악을 짊어져야 합니까”(『예레미아애가』 5 : 7)라고 우리의 자식들은 우리를 원망할 것이다. 믿는 사람들만이라도 정신 차렸더라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죄책감에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다. “천명이여, 그대는 있는가, 없는가?”(天道 是也非也, 사마천) 김문수·이준석, 그대들의 결심이 아니면 저 들판에 널브러진 창생을 누가 구하겠소?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