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인터넷신문]우리나라 농촌 고령자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있다. 몸이 불편해도 아침 일찍 밭으로 나가 일을 시작하고, 심지어 병원에서 퇴원한 직후에도 다시 일손을 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농사를 그만두면 죽는다", "쉬면 무가치하다"는 인식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이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중독(Workaholism)’은 고령자의 건강을 해치고 삶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를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촌 고령자의 과로 문제는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한 구조적 대처나 사회적 치유 시스템은 미비한 실정이다. 반면 대만이나 일본 등지에서는 고령자의 일중독 문제를 사회적으로 인식하고, 치유와 돌봄의 관점에서 대응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지역 농회(우리나라의 농협에 해당)에서 운영하는 ‘그린케어스테이션’을 통해 고령자의 일중독 문제를 치유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일’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을 활용한다는 데 있다. 즉, 고령자들이 익숙한 ‘일’을 통해 치유하는 방식이다. 이른바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원리와 유사하다. 다만 그 일은 고령자의 신체 상태와 선호도를 반영한 맞춤형이며, 경제적 생산이 목적이 아닌 ‘노는 농사’, ‘즐기는 농사’이다. 이를 통해 고령자 스스로 자존감을 유지하면서도 무리 없이 신체적, 정신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
일본 나가노현(長野縣) 이이다시(飯田市)의 ‘농락숙(農楽塾)’은 또 하나의 주목할 사례다. 이 프로그램은 2015년부터 지역의 비영리단체인 ‘남신슈 햇빛 진흥기구(南信州おひさま進行機構)’와 ‘농이 있는 삶 연구회(農ある暮らし研究会)’가 주도하여 만들어졌다. 농락숙은 65세 이상 고령자 중 은퇴 후 외로움이나 심리적 공허감을 겪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혼자 농사짓기 어려운 노인들을 위해 공동 텃밭을 조성하고, 월 1~2회 모여 함께 밭일을 한다. 허브 심기, 꽃밭 가꾸기, 제철 채소 재배 등 가벼운 일 중심이며, 점심 도시락 나눔이나 계절 관찰 일지 작성 같은 활동도 병행한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농사가 아니라 정서적 치유이자 사회적 연결의 장이다. 참여자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 가장 위로가 된다”, “밭은 손에서 놓지 않았지만 이제는 부담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우울증 감소, 치매 초기 증상 억제 등의 긍정적인 건강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더불어 이전에는 얼굴조차 몰랐던 이웃들과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며 지역 커뮤니티도 되살아나고 있다. 지역 보건소와 복지기관과의 연계를 통해 돌봄 체계가 강화되고, 젊은 세대의 참여도 늘어나며 세대 간 교류의 장도 마련된다.
농락숙의 핵심은 “농사를 그만두라”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꿔보자”는 제안에 있다. 이는 고령자의 자존감을 해치지 않으면서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지혜로운 방식이다.
이제 우리도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농촌 고령자의 일중독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무리한 노동에서 비롯되는 질병과 고립, 정신적 불안은 결국 지역 사회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대만의 그린케어스테이션, 일본의 농락숙처럼 치유농업을 활용한 통합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전주기전대학 치유농업과는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외 사례를 연구하고, 실천 가능한 모델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지금은 단순히 농촌 노인을 ‘돌본다’라는 관점을 넘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함께 건강한 일상을 만들어가는 치유농업적 접근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