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 ㊿ 8·3 사채 동결 조치

1972년 8월 2일 밤 10시. 청와대에서 임시 국무회의가 열렸다. 경남 진해에서 휴가를 보내던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빗속을 뚫고 육로를 달려왔다. 김종필 국무총리는 삼청동 공관에서 장관들과 저녁을 먹다 참석했다. 상당수 장관은 영문도 모른 채 청와대로 들어왔다.
밤 11시40분, 태완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 특별 담화문을 발표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경제 문제를 과감·신속하게 해결하려…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다음 요강의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습니다. 1. 모든 기업은 8월 2일 현재 보유한 모든 사채를 정부에 신고해야 한다….’

‘경제의 성장과 안정에 관한 긴급명령 15호’ , 이른바 ‘8·3 사채 동결 조치’는 이렇게 실시됐다. 골자는 기업이 가진 연리 40~50% 사채를 월 1.35%(연 16.2%)로 바꾸고, 그것도 3년 동안은 묶어 놓았다가 이후 5년에 걸쳐 나눠 갚도록(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 하는 것이었다. 당시 물가 상승률이 연 15% 안팎이었음을 고려하면, 사실상 이자를 없앤 셈이다.

기업은 횡재했지만 사채를 준 채권자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 재산권 행사를 억지로 묶었다는 점에서 8·3 조치를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쿠데타’라고도 부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국내 기업들은 73~74년 석유 파동을 버텨 낼 체력을 비축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에 대한 쿠데타는 한국 주식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사채 전성시대…은행이 중개하기도
1960년대 매년 10% 안팎 고속 성장하던 한국 경제는 60년대 말 들어 심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기업의 빚이 문제였다. 기업들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설비 투자를 확 늘렸다. 요즘 같으면 설비 투자 자금은 은행에서 장기 대출을 하거나, 증권시장에서 주식을 발행(자본 조달)해 마련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당시 은행들은 기업에 빌려줄 돈이 충분치 않았다. 사람들은 은행 예금을 외면하고 더 많은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사채 시장에 돈을 넣었다. 증권시장에는 고작 40여 업체가 상장돼 있었으며, 주식 거래도 활발하지 않았다. 결국 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높은 이자를 주고 사채를 끌어다 썼다. 심지어 은행이 중간에서 사채를 중개하기도 했다.
71년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기업의 90% 이상이 월 이율 4% 사채를 사용했다. 엄청난 이자를 감당하기 위해 기업들은 제품 가격을 올려야 했고, 물가 상승은 다시 시중금리를 자극하는 악순환의 굴레에 빠졌다. 결국 69년 정부는 아세아자동차 등 30개 부실기업을 정리했다.
70년대 들어 상황은 더 나빠졌다.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의 재정·무역 적자가 커지면서 달러 가치가 떨어지고 글로벌 경기가 흔들렸다. 원화는 달러보다 더 가치가 떨어졌다. 그 와중에 60년대에 빌렸던 외국 차관의 만기가 닥쳤다. 달러 빚을 진 기업들은 원화 가치 하락 때문에 빌렸을 때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갚아야 했다.
견디다 못한 기업들은 정부에 손을 내밀었다. 71년 6월 11일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김용완 회장과 정주영 부회장 등이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만나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심각성을 깨달은 박정희는 남덕우 재무장관 등에게 대책을 마련토록 했다. 사채를 동결하는 쪽으로 큰 줄기를 잡았다. 다음은 세부 대책을 마련할 차례였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보안이 중요했다. ‘사채 동결’이란 말이 새어 나가는 날엔 채권자들이 미리 돈을 빼낼 것이고, 결과적으로 기업들이 줄도산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보안을 위해 대책 수립 참여자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8월 2일 밤 임시 국무회의가 열릴 때까지 상당수 장관이 안건조차 몰랐던 이유다. 참여자에겐 비밀유지 서약서와 더불어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즉각 조치할 수 있도록 사직서까지 미리 받았다.
대책을 수립하던 서울 회현동 호텔 방에는 ‘경주개발종합계획’이라는 괘도를 걸어 위장했다. 복사기가 고장 났을 때 수리 기사를 부르지 않아도 되도록 분해·조립법까지 익혔다.(『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 김용환 지음)

이런 과정을 거쳐 8·3 조치가 전격 시행됐다. 1주일간 신고받은 사채는 4만677건, 3456억원이었다. 신고 전 전경련이 추정했던 금액(1800억원)의 두 배 가까운 수치이며, 당시 통화량의 80%를 넘는 규모였다. ‘통화량의 80%’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는가. 지금으로 따지면 올 9월 통화량이 약 4430조원이었으니, 그 80%면 3540조원이다.

사채의 그늘 속에 숨어 있던, 더 짙은 그림자도 드러났다. 전체의 약 3분의 1에 달하는 1137억원은 채권자가 해당 기업의 대주주인 ‘위장 사채’였다(『한국 경제정책 30년사』, 김정렴 지음). 자기 기업에서 연 40~50% 이자를 받는 돈놀이를 해왔던 것이다. 정부도 이런 구조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과점주주의 사채는 주식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8·3 조치에 넣었다. 위장 사채 규모가 1억원을 넘는 기업에 대해서는 일체 정책 혜택을 받을 수 없도록 하라는 대통령의 엄명도 떨어졌다.
상호신용금고와 신용보증기금 탄생
8·3 조치는 기업들에 큰 특혜였다. 그러나 혜택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물가 상승을 3% 내외로 억제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기업들에 제품 가격을 올리지 말라는 지시였다. 이자 조정 혜택을 받은 기업들이 치러야 할, 일종의 비용이었다.

8·3 조치에 직접 넣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 정부는 기업들에 주식시장 상장(기업공개)을 촉구했다. 73년 1월에는 ‘기업공개 촉진법’을 만들었다. 8·3 조치를 준비할 때부터 구상한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막상 사채 경감 혜택을 받은 기업들은 공개를 망설였다. 그러자 정부는 74년 ‘5·29 특별지시’를 통해 상장토록 압박했다. ‘강제 상장 조치’라고도 불리는 5·29 특별지시는 기업의 세무 관리를 강화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72년 66개사에 불과했던 상장 기업 수는 79년 355개로 늘어나며 자본시장이 제자리를 찾게 됐다.
8·3 조치는 에너지·철강·화학 등 15개 부문을 합리화 업종으로 지정해 장기저리 대출을 해준다는 내용도 담았다. 또 8·3 조치와 맞물려 단자회사와 상호신용금고, 신용보증기금이 생겼다. 사채 부담만 줄이는 대증요법(對症療法·증상을 완화하는 정책)에 그친 것이 아니라 금융·자본 시장 전체를 손보는 일대 수술이었던 것이다.

8·3 조치로 당장 기업의 재무구조가 튼실해지고 이익이 늘었다. 71년 8.4%였던 기업의 이익률은 73년 12.8%로 뛰었다. 나라 경제 전체로도 효과를 발휘했다. 73년 수출은 전년보다 무려 76% 늘었다. 1차 석유 파동 속에서도 73년은 14.8%, 이듬해엔 9.5%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중화학공업 투자·육성도 착착 진행됐다.
8·3 조치가 대기업에 ‘대마불사(大馬不死)’의 면죄부를 줬다는 부정적 견해도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개인의 재산권을 심각하게 제한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쿠데타이기도 하다. 개발 독재 시대가 아니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조치다.
8·3이 이뤄낸 사금융의 양성화는 제도권 금융의 혁신과 더불어 금융 개혁의 궁극적 과제다. 8·3 조치가 아니었다면, 당시처럼 불안정한 환경에서 사금융 자금은 산업 투자보다 부동산이나 고리대금 쪽으로 쏠렸을 것이다. 기업 역시 자금을 그런 쪽으로 운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8·3 조치는 이런 자금의 물줄기를 산업 쪽으로 돌렸다. 사채 조정과 더불어 금리 인하, 출자전환, 기업공개 촉진 등 기업금융의 구조적 개선과 산업 합리화를 위한 대대적인 투자 촉진을 선언함으로써 3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겠다는 정부 의지를 표출한 정치적 결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관료들이 사채 조정에만 그치지 않고 사금융과 기업금융 시스템 전반을 개혁하는 정책을 세워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대증요법만 난무하는 요즘 되돌아봐야 할 점이 아닐까.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3저 시대의 고성장’ 편입니다.
도움말·자료=이명휘 이화여대 교수, 정리=권혁주 기자 kweon.hyukjoo@joongang.co.kr
![[주춘렬 칼럼] 韓·美 관세협상의 그늘](https://img.segye.com/content/image/2025/11/17/20251117516911.jpg)
![[설왕설래] 금융계급제](https://img.segye.com/content/image/2025/11/16/20251116509770.jpg)

![[오늘의 차트] 美 머니마켓 스트레스와 자산시장 유동성 압박](https://img.newspim.com/etc/portfolio/pc_portfolio.jpg)

![국고채 불안에 예금·대출금리 줄줄이 오른다 [AI 프리즘*금융상품 투자자 뉴스]](https://newsimg.sedaily.com/2025/11/17/2H0HMAYAYF_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