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갈등이 남긴 상흔은 단순한 정책적 충돌을 넘어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의 근간을 지탱하는 신뢰의 붕괴를 초래했다. 그동안 이 위기를 해결하려는 논의들은 ‘국민을 위한 의료’라는 공허한 슬로건에 머물렀을 뿐, 실질적인 이정표를 제시하지 못했다. 진정한 신뢰 회복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논의에 앞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라는 명확한 어젠다를 정립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의료 시스템의 핵심을 관통하는 두 가지 가치는 상충적이면서도 필수불가결하다. 바로 ‘최적의 의료 환경 제공’과 ‘건강보험 재정의 합리적 운영을 통한 지속 가능성 확보’이다. 이 두 가지 핵심 가치는, 한정된 자원으로 무한한 수요를 충족해야 하는 의료 시스템 특성상 끊임없이 상충하며 타협을 요구하는 근본적인 딜레마이다. 최적의 진료는 자원 투입을 요구해 재정 부담으로 이어지고, 재정 안정만을 추구하면 진료의 질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 국민과 의사의 신뢰 회복은 바로 이 딜레마를 외면하지 않고, 지혜롭게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의료개혁은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과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의·정 갈등 이후 논의는 이 근본적인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 대신, ‘의료 전달체계 개편’ ‘보상체계 개선’ ‘의료인력 확충’과 같은 전술적인 방안들만 파편적으로 제시됐고, 이들을 꿰뚫는 통합된 전략적 비전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의료개혁 논의는 공회전하며 신뢰를 갉아먹는 소모전이 됐다.
이러한 전략적 공백은 거버넌스 운영의 비효율성으로 이어진다. 현재까지의 여러 위원회나 의·정 협의체는 논의 시작부터 편향된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성과 지표가 없어 공허한 소통에 그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진정으로 작동하는 거버넌스는 단순한 협의체가 아니라, 명확한 어젠다를 향해 작동하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논의 결과가 ‘국민에게 최적의 진료 환경을 제공하고 의료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는’ 목표에 부합하는지 꾸준히 평가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국민과 의사 간 신뢰 회복은 감성적인 주장이나 이익집단의 논리가 아닌, 과학적 근거와 법적 타당성을 기반으로 이뤄져야 한다.
신뢰 회복을 위한 새로운 항해는 명확한 어젠다를 이정표 삼아, 냉철한 분석과 유기적인 전술을 통해 진행돼야 한다.
첫째, ‘최적의 진료 환경 제공’은 의료 자원의 양적 확대를 넘어, 효율적인 배분과 질적 향상을 통해 달성된다. 예를 들어 의료인력 확충 문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과 비교하는 양적 접근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의료 이용률, 진료 방식, 병원 운영 체계가 다르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구구조, 질병 양상, 소득수준 등을 반영한 과학적 수급 추계 및 조정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환자 중심의 합리적 의료 이용을 유도하기 위해 정부 주도의 공신력 있는 일원화된 창구를 통해 의료인·의료기관 정보, 비급여 정보 등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환자 눈높이에 맞는 정보 제공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둘째,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 가능성 확보’는 의료 시스템의 미래를 담보하는 핵심이다. 2004년 20조원에서 2024년 110조원에 이르는 건보 재정의 가파른 상승은 노인 인구 증가와 실손형 의료보험 확대 등 복합적인 요인에 기인한다. 건보 재정 역시 OECD 통계가 아닌, 혼합 진료 증가와 같은 국내 특수성을 반영한 ‘한국형 추계 모델’을 통해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정부는 이러한 신뢰 회복 노력에서 특정 주체의 대변자가 아니라 공익을 위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신뢰는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복잡한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국민과 의사 간 신뢰=(명확한 어젠다+공정한 거버넌스)×(유기적 전술)’이란 공식에 따라야 한다.
특정 시기에는 보편적 접근성과 의료의 질 향상에 더 큰 가치를 두어 재정 투입을 확대할 수 있고, 또 다른 시기에는 재정 건전성 확보를 최우선으로 해 효율성 증대에 집중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상충적 어젠다 중 어디에 더 무게를 두고 운용할 것인지는 운영 주체의 철학과 시대정신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고, 어떤 철학적 기반 위에서 어젠다의 균형점을 찾아가느냐가 바로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의 미래와 국민의 신뢰를 결정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