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IT시장이 흥미로운 건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이번엔 CRM 터줏대감 세일즈포스와 ITSM의 개척자 서비스나우가 정면 대결을 펼치게 됐다. 서비스나우는 세일즈포스의 핵심인 CRM을, 세일즈포스는 서비스나우의 ITSM을 정조준하고 있다.
서비스나우는 지난 5일 개최한 ‘날리지2025’ 컨퍼런스에서 ‘서비스나우 CRM’을 정식 출시한다고 발표했다.
서비스나우 CRM은 AI 시대에 맞춰 CRM을 재구성해 하나의 플랫폼에서 판매, 이행, 서비스 등을 수행하는 엔드투엔드 경험을 제공한다. 기업의 전체 고객관리 수명주기에서 빠르고 원활한 경험을 위해 AI 기능으로 여러 부서의 작업을 조율해 애플리케이션과 고객 요청 간 전환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여준다고 회사측은 설명했다.
서비스나우는 “기존 CRM은 프론트 오피스에서 끝나는 기록시스템(SRM)으로, 고객 확보와 유지에 위험을 초래한다”며 “서비스나우 CRM은 AI 중심 세상을 위해 설계돼 고객 수명주기 전반에 걸쳐 개인화되고 선제적인 경험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또한 “서비스나우 AI 플랫폼은 여러 시스템과 부서의 워크플로우를 연결해 스프레드시트, 공유된 받은편지함, 휴먼 미들웨어에 얽매인 비효율적인 프로세스를 제거한다”고 덧붙였다.
서비스나우는 일찌감치 CRM 시장에 눈독을 들여왔다. 서비스나우 플랫폼은 기업 업무 워크플로우 자동화를 담당하는데, 서비스나우 플랫폼 상에서 CRM 관련 워크플로우는 연간 계약금액(ACV) 14억달러 규모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2024년말 기준 전년대비 30% 성장한 것이다.

빌 맥더못 서비스나우 최고경영자는 최근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현재 상황에 불만을 품은 고객의 이야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듣고 있다”며 “오랫동안 우리가 이기기 위해 누고 손해볼 필요가 없다고 말해왔지만 고객이 우릴 바꿔놨다”고 말했다. 그는 “고객은 다른 누군가 손해를 보길 바라며, 서비스나우에 더 많은 투자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서비스나우는 “오늘날 고객은 빠른 서비스 그 이상을 기대하며, 고객의 요구를 예측하고 문제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개인화되고 능동적인 경험을 원한다”며 “서비스나우 CRM의 새로운 기능은 기업이 수동적인 고객 서비스에서 능동적 참여로 전환하고, 모든 부서에서 일관된 서비스 경험을 보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지능형 솔루션을 제공한다”고 강조했다.
서비스나우는 이와 함께 판매, 처리, 서비스 제공에 이르기까지 전체 고객 수명주기 전반의 업무를 자율적으로 조율하고 완료할 수 있는 AI 에이전트인 ‘CRM AI 에이전트’를 출시했다. 이 에이전트는 사전 정의된 규칙 기반 자동화 대신 고객 문의를 즉시 처리하고, 복잡한 사례를 전체 맥락에 맞춰 전달하며, 부서 간 워크플로우를 관리해 최적의 대응 방침을 동적으로 결정한다. 에이전트들은 고객 요청을 파악하기 위해 대화형 상호작용으로 시작해 필요한 경우 실제 상담원과 조율해 전체 처리 프로세스를 관리한다.
서비스나우는 지난 4월 AI 기반 구성 가능 CPQ 솔루션을 제공하는 로직닷에이아이(Logik.ai)를 인수했다. 로직닷에이아이는 제품의 구성, 가격 설정, 견적 생성 등의 프로세스를 자동화하는 기술과 솔루션을 보유했다.
CRM 시장의 강자는 세일즈포스다. 세일즈포스는 전세계 영업 업무의 필수 SaaS로 자리잡았다. 세일즈포스는 현재 분기 매출 100억달러을 기록하며, 새 회계연도에 연매출 400억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서비스나우와 세일즈포스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성장했다. 서비스나우는 20년전 기업의 IT서비스 관리(ITSM) 솔루션으로 시작해 오늘날 업무 프로세스 자동화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세일즈포스는 CRM에서 시작해 마케팅을 넘어 AI 에이전트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두 회사는 점차 솔루션 접점을 늘려왔다. 서비스나우 플랫폼이 조직 내 다양한 업무 흐름을 자동화하기 때문에 워크플로우 안에 세일즈포스의 CRM 서비스도 포함된다. 다만, 그동안 서비스나우는 CRM 애플리케이션 핵심엔 접근하지 않았다.

서비스나우 플랫폼은 여러 데이터 저장소를 수평적으로 관리하고, 데이터를 한곳으로 모으려 이동시키지 않는다. 시스템, 프로세스, 워크플로우를 플랫폼으로 연결하면 된다. 그에 비해 시중의 CRM 솔루션이 지나치게 분산되고 쪼개져 워크플로우로 통합하기 힘들어졌다는 게 서비스나우의 설명이다.
서비스나우는 리드 및 기회 관리, 구성, 가격 및 견적, 주문 관리 및 이행, 고객 서비스 및 지원, 현장 서비스와 고객 성공 및 갱신 등을 통합한다. 또한 재고 및 공급망 등의 다른 기능 전반에 CRM을 연결할 수 있다.
서비스나우는 세일즈포스를 경쟁사로 언급하지 않지만, 상당히 공격적으로 기존 CRM 시스템을 깎아내린다.
아밋 재버리 서비스나우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솔직히 기존 CRM은 망가졌고, 포인트 솔루션을 덕트 테이프와 껌으로 엮어 놓은 것일 뿐”이라며 “그 결과 복잡성은 커지고 비용은 늘지만 가치는 떨어진다”고 평가절하했다.
시중의 CRM 솔루션은 SAP의 ERP처럼 영업과 고객관리에 필요한 다양한 기능을 고객 사례를 따라 가며 늘려왔다. 세분화된 기능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일련의 흐름으로 볼 때 분절을 야기하고 유기적인 부서 간 협력을 저해하기도 한다. 서비스나우는 바로 이 약점을 공략한다.
서비스나우의 CRM 출시는 사실상 예고된 것이었다. 수년간 CRM 워크플로우와 밀접하게 연결돼 왔다. 빌 맥터못 CEO는 CRM 시장 진입을 공공연히 밝혀다. 빌 맥더못 CEO는 1분기 실적발표에서 CRM이란 단어를 35회나 언급했다. 최근 시장의 뜨거운 화두인 AI 에이전트 언급은 11회였다. 그만큼 CRM 시장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는 것이다.
서비스나우가 세일즈포스의 CRM 시장 공략 성공을 확신한 포인트는 AI 에이전트다. AI 에이전트가 다양한 시스템을 초월해 업무 흐름을 조율하고,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상황에서 CRM 코어 기능까지 제어할 수 있다면 자동화 시너지가 더 커질 수 있다.
기업이 AI 에이전트에 우호적인 입장을 갖고 대규모 투자를 검토하는 상황에서 서비스나우에게 현 시점이 CRM 시장에 진입할 최적의 적기일 수 있다.
AI 에이전트는 분절된 시스템 프로세스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서비스나우에게 이상적인 도구다. 에이전트가 복잡한 업무를 자율적으로 수행하려면 CRM, ERP, 공급망, HR 등 각 시스템의 데이터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데이터를 애플리케이션마다 개별적으로 관리하는 기존 환경에서 타파돼야 할 장애물이다. 이는 시스템마다 단편화된 프로세스와 데이터 소스 등의 내부 장벽을 허무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서비스나우가 단일 플랫폼, 단일 아키텍처, 단일 데이터 모델 등을 자사의 최고 이점으로 내세워온 만큼 서비스나우의 AI 에이전트는 CRM 영역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흥미롭게도 서비스나우가 세일즈포스의 주력 시장에 진입하는 시점에, 세일즈포스도 서비스나우의 주력 시장인 ITSM에 진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서비스나우가 CRM을 강조하면서 내세운 키워드인 AI, 에이전트, 플랫폼 같은 단어들이 세일즈포스에서 최근 강조하는 키워드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도 볼거리다. 세일즈포스는 플랫폼, AI, 에이전트를 강조하면서 ‘에이전트포스’를 강력히 밀고 있다.
지난 2월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마크 베니오프 세일즈포스 CEO는 “트레일블레이저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곧 출시될 새로운 ITSM 제품을 살짝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3월 개최된 세일즈포스 트레일블레이저 DX(TDX) 2025 컨퍼런스에서 ‘에이전트포스 2DX’와 ‘에이전트 익스체인지’ 등이 공개됐다. 에이전트포스 2DX는 AI 에이전트 플랫폼으로서, AI 에이전트는 기업 내 모든 애플리케이션 및 시스템과 통합을 지원한다. 기업 데이터 시스템, 업무 로직,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연결돼 기업의 비즈니스 요구를 예측하고, 자동으로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한다. 애플리케이션에 AI 에이전트를 탑재할 수 있는 에이전트포스 API와 세일즈포스에서 AI 에이전트를 실행할 수 있게 지원하는 에이전트포스 인보커블 액션, 뮬소프트 API 기반 AI 에이전트 확장 기능 등이 들어갔다.
또한 AI 에이전트의 마켓플레이스인 ‘에이전트 익스체인지’를 통해 200개 이상 파트너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AI 에이전트로 기업 업무를 자동화하도록 했다.
애덤 에반스 세일즈포스 AI플랫폼부문 부사장은 “기업 내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반면, 이를 수행할 리소스는 한정되어 있다”며 “AI 에이전트는 이러한 직면 과제 해소를 지원하는 핵심 기술이며, 조직 내 생산성 향상과 비즈니스 혁신을 견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세일즈포스는 고객관계관리(CRM)의 영역을 넘어 고객이 모든 비즈니스 프로세스에 AI를 적용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직 세일즈포스는 서비스나우의 선전포고에 별다른 응전 태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에이전트포스가 서비스나우의 영역인 비즈니스 워크플로우 자동화를 건드리는 만큼 조만간 구체적 경쟁 메시지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서비스나우의 ITSM을 건드리는 제품으로 ‘세일즈포스 서비스 클라우드’가 거론된다.
서비스나우와 세일즈포스의 충돌은 엔터프라이즈 애플리케이션 스택의 근본적 변화를 보여준다. 특정 목적에 따라 개별로 구축된 기업용 비즈니스 애플리케이션이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AI 에이전트의 등장으로 형해화되고, 비즈니스 IT 환경이 ‘사용자-AI에이전트-데이터’란 새로운 형태로 재편되는 와중에 있다. 앞으로 비즈니스 애플리케이션 시장의 경쟁은 각자 영토에서 지배권을 가졌던 영주들이 하나의 전장에서 마주하며 격전을 펼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김우용 기자>yong2@byline.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