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가 산업재해 방지 정책과 감독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이 소식을 접하며 1970년대 초등학교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마을 형들과 누나들은 대부분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농사일을 거들다 서울·광주·마산 같은 대도시 공장으로 향했다. 그들은 힘겹게 번 돈으로 부모님께 소를 사드리고 동생들 학비를 대며 삶의 보람을 찾았다. 명절이면 선물을 들고 고향을 찾아와 가족과 정을 나누었고, 가난에서 벗어날 길을 열어준 국가와 대통령을 칭송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에는 공장의 혹독한 현실도 빠지지 않았다. 휴일 없는 장시간 노동, 끝없는 야근과 잔업, 그리고 무엇보다 작업 중 크게 다친 동료들의 이야기는 늘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았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누구든 사고당한다”는 말은 인사처럼 오갔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 사고들이 단순한 개인의 부주의가 아니라 국가와 기업이 끝없이 이윤만을 좇던 구조적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산업 현장의 인명 피해를 지적하며 근본 대책을 강도 높게 주문하고 있다. 강력한 법 집행과 지속적 감독을 강조하는 모습은 국민의 생명을 무엇보다 우선하는 정치의 바른 방향이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이 남는다. 과연 법과 처벌만으로 충분할까? 제도적 장치와 불이익이 유일한 해법일까?
이 질문에서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이 떠오른다. 우리는 흔히 그를 <국부론>의 저자, ‘보이지 않는 손’을 말한 사람으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국부론>보다 17년 앞서 <도덕감정론>을 저술했고, 죽기 전까지 6차례 개정할 만큼 애정을 기울였다. 경제학자들조차 <국부론>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도덕감정론>을 함께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덕감정론>의 핵심은 이렇다. “인간은 아무리 이기적이라 해도 본성 깊은 곳에는 선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타인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에게 아무 이익이 없어도 다른 이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다.” 스미스는 인간이 본래 선한 본성과 타인에 대한 관심, 공감과 배려를 지닌 존재라고 보았다. 그가 말한 ‘이기심’ 역시 단순한 자기 욕망이 아니라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이었다. 아마도 그는 경제의 가치를 단순히 돈의 축적에만 두지 않고, 기업·시장과 인간이 함께 선순환하는 건강한 생태계를 지향했으리라 짐작된다. 그의 사상 속에는 이윤과 인간의 삶이 나란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맹자가 말한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에게는 타인의 아픔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곧 측은지심이 본래 깃들어 있다고 그는 보았다. 맹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물에 빠질 위기에 놓인 어린아이를 본다면 누구나 즉각 구하려 들 것이다. 그것은 그 아이의 부모에게서 어떤 보상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고, 이웃이나 친구들의 칭찬을 바라서도 아니며,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는 비난을 피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직 본능적으로 솟아나는 연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동체대비(同體大悲) 역시 같은 뜻을 전한다. 너와 내가 본래 하나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연민과 사랑을 뜻한다. 그러나 연민은 추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제도와 환경, 책임 있는 감독이라는 구체적 ‘방편’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사회는 안전해진다. 안전한 근로환경이야말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연민이 제도화된 결과다.
스미스는 또 ‘공정한 관찰자’를 말한다. 그것은 내 안에 존재하며, 나의 행위가 도덕적이고 공정한지를 끊임없이 살펴보는 양심의 목소리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산업재해를 막기 위해 법조문과 감독관의 처벌만을 두려워할 것인가, 아니면 내 안의 양심과 상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인가. 답은 명확하다. 생명을 존중하는 길은 언제나 법을 넘어 인간 본성의 선함과 양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바로 그때, 법과 제도 또한 더 큰 힘과 설득력을 얻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