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클릭

2025-05-18

문득 휴대폰을 켜니 광고 속 여행지가 어제 꿈에서 봤던 풍경 같다. 식사시간이 다가오자 스마트폰을 열기도 전에 배달앱이 ‘당신이 좋아할 메뉴’를 띄운다. 주말 저녁엔 한 번도 검색하지 않았던 영화가 넷플릭스 첫 화면을 가득 채우는데 이 역시 왠지 딱 보고 싶던 장르다. 검색하지 않았지만 익숙하고, 고르지 않았지만 원했던 것을 척척 눈앞에 대령한다. 언젠가부터 선택은 내가 아닌 알고리즘의 몫이 되고 있다. 마음이 움직이기 전에 화면이 먼저 반응하는 시대, 바야흐로 제로클릭(zero-click)의 시대다. 검색은 사라지고, 비교는 생략되며, 구매는 예감처럼 이뤄진다. 이 편리한 순응의 구조 속에 고객의 여정(CEJ·Customer Experience Journey)이 빠르게 압축되고 있다.

음식·영화 등 AI 맞춤 추천으로

능동적인 고객 역할에 큰 변화

검색 없이 순식간에 구매 결정

기업의 고객 설득 더 어려워져

한때 고객은 탐험가였다.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고, 스크롤을 내리며 수많은 옵션을 탐색했다. 검색(Search)은 곧 선택의 권한이었고, 비교는 합리성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데이터로 무장한 인공지능(AI)을 만난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AI가 탐색과정을 하나씩 걷어내면서, 이제 고객은 무언가를 검색하기도 전에 이미 선택된 세계와 마주한다. AI는 사용자의 행동·시간·위치·취향을 읽고, 눈길보다 한발 먼저 결과를 건넨다. 고객들의 검색은 줄고, 망설임은 생략되며, 결정은 순간화되는 것이다. AI 기술은 그렇게 고객 여정의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AI의 예측력 덕에 고객은 구매 시 더 이상 길을 묻지 않아도 된다. 길이 먼저 고객에게 말을 걸 것이다. AI는 사용자의 관심사와 습관까지 조용히 수집하고 계산한다. 검색창 앞에서의 망설임, 수십 개의 탭을 넘나들며 제품을 비교하던 시간은 곧 과거의 모습이 될 것이며, 무엇을 원하기도 전에 원하는 것이 도착하는 경험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AI 시대에 클릭 없는 선택은 ‘능동’의 영역이 아니라 ‘수용’의 역할이 되는 셈이다.

검색이 줄어들면 당연히 고객의 여정은 단축된다. 고객의 CEJ는 예전처럼 ‘인지-탐색-비교-결정’의 일렬종대가 아니라, 이제는 ‘인지 이전의 제안-즉각적 반응’이라는 압축된 구조로 재편될 수 있다. 고객은 목적지를 모른 채 어느새 도착해 있고, 브랜드는 고객의 클릭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고객과의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단계를 생략하고 편리함을 배가시킨 제로클릭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은 맥락을 요구한다. 경로는 짧아졌지만 의미의 강은 더 깊어졌다. 마치 오랜 연인이 말없이 전하는 눈빛 하나가 더 많은 말을 담아내듯이, 클릭 없는 추천은 브랜드와 고객 사이에 침묵 속 설득을 요구한다.

이러한 변화로 기업도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검색 없이 선택되는 세상에서 첫 화면에 뜬다는 것, 알고리즘이 선택한다는 것은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브랜드가 얼마나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 얼마나 일관된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지, 얼마나 나의 삶을 미리 이해하고 있었는지 디테일을 시험받는 순간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업이, 그리고 브랜드가 싸워야 할 상대는 경쟁 브랜드가 아니라 고객의 무관심이다. 스크롤을 멈추지 않는 손가락보다 위험한 것은 ‘왜 이걸 나에게 보여주는가?’라는 고객의 본능적인 의구심이다. 때문에 추천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가 되어야 하며, 고객의 무의식 속에 남아야 한다. 다시 말해 첫 화면에 뜨는 건 기술이지만 고객의 기억에 남는 건 서사다. 제로클릭 시대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맥락(Context)인 이유다. 기업들은 이제 고객으로 하여금 ‘이 브랜드는 나를 알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설계해야 한다. 검색 없이 전달되는 정보일수록 고객은 그 정당성을 더 민감하게 판단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취향 분석을 넘어, 타이밍과 맥락을 감지하고 포착하는 새로운 무의식형 제안이 필요하다.

제로클릭은 기존 퍼넬(Funnel)의 붕괴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루프(Loop)를 설계하는 직관적 사고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AI 기술로 고객 여정의 지형변화를 일으킨 제로클릭은 기술의 진화가 아니라, 관계의 재설계에 주안점을 둔다. 검색 없는 소비는 맥락 없는 제안에 취약하다. 이제 브랜드는 묻기 전에 대답하고 설명 없이 설득해야 한다. 다수의 클릭이 사라진 자리엔 오직 맥락과 태도만이 남는다. 탐색의 종말을 부르는 제로클릭의 시대, ‘정보의 여정’에서 ‘감정의 여정’으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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