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혐오하고 잘라내고 배제하는 정서가 많잖아요. 그런 감정들이 세상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세계 여러 곳의 뮤지션들과 함께 노래를 만들며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으로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노래하는 음유시인’ 루시드폴이 정규 11집 <또 다른 곳>으로 돌아왔다. 정규앨범으로는 2022년 발매한 <목소리와 기타> 이후 3년 만이다. 앨범 발매일인 지난 7일 서울 강남구 안테나 사옥에서 만난 그는 “새 앨범이 다른 분들에게 어떻게 들릴까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 음악이 누군가에게 닿아 우리가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새 앨범 <또 다른 곳>에는 루시드폴이 최근 2~3년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며 영감을 얻은 9곡이 실렸다. 일상과 시간의 기록을 음악으로 담아내는 그답게 이번 앨범 역시 그가 바라본 ‘요즘 세계’를 펼쳐냈다. 그는 앨범 제목인 ‘또 다른 곳’에 대해 “지리적으로 이곳이 아닌 다른 곳, 내가 살고 있는 제주도나 한국이 아닌 어딘가, 혹은 여기보다 더 나은 세상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저는 세상을 세 개의 우주로 나눠요. 첫째는 ‘나’라는 우주, 둘째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우주, 셋째는 나와 간접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우주예요. 점점 두 번째 우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SNS나 유튜브에 도파민이 넘쳐나고 피로감이 쌓이죠. 그러다 보니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세 번째 우주를 향한 관심이 부쩍 늘었어요.”
그는 “캄보디아,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와 아무 관련 없는 일들이 아니다”라며 이번 앨범에 세 번째 우주를 향한 연대와 응원의 마음을 담았다고 말했다.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구를 표현한 ‘피에타’, 팔레스타인 민중을 생각하며 쓴 ‘늙은 올리브나무의 노래’, 힘든 시기를 겪는 모두가 희망을 품고 연대하기를 소망하는 ‘등대지기’는 2015년 세월호를 생각하며 쓴 ‘아직 있다’에 대한 응답가다. ‘레미제라블 파트3’는 2009년 발표한 ‘레미제라블 1, 2’ 이후 16년 만에 다시 쓴 연작곡으로 세계 각국의 시민들이 저항하는 소리를 노래의 일부로 활용했다.
루시드폴은 “통치자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쓰게 된 곡”라며 “2009년 당시에는 ‘레미제라블’이 가난하고 비참한 민중을 칭하는 말이었다면, 지금 제가 생각하는 비참한 사람은 시민들을 억누르려 하는 통치자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곳>이 철학적이고 무겁기만 한 건 아니다. 귀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사운드, 변함없이 따뜻한 목소리가 찬바람 부는 마음에 위로와 희망을 전한다. 타이틀곡 ‘꽃이 되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공감하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사랑 노래로, 소속사인 안테나 직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타이틀곡으로 선정됐다.
2005년 <오, 사랑> 앨범에 수록된 ‘물이 되는 꿈’을 포르투갈어 버전으로 새롭게 녹음한 ‘아구아’(Agua)도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는 곡이다. 2020년 ‘물이 되는 꿈’을 그림책으로 엮어 발간했던 그는 올해 브라질에서 번역본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어로 노래를 다시 부르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했다.
“번역된 가사로 노래를 불러보니 이게 잘 안 맞아요. 원곡 멜로디를 포르투갈어 가사 음절에 맞게 수정해 다시 불러봤는데 들어본 분들이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20년 전 지은 집을 리모델링한 셈이죠. ‘물이 되는 꿈’이 20년 된 노래인데 20살 터울의 외국인 동생을 하나 낳은 느낌이에요”(웃음)
이번 앨범에는 스페인 기타리스트와 아르헨티나 재즈 뮤지션, 브라질 싱어송라이터 등이 함께 참여했다. 앨범 커버 사진은 칠레 작가가 촬영했고 음반에 동봉된 해설지는 일본 작가가 써준 것이다. 루시드폴은 “각자 다른 곳에 살고 있지만 음악적으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며 세계 곳곳의 뮤지션들과 음악을 통한 연대의 가능성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1998년 ‘미선이’ 밴드로 가요계에 데뷔한 루시드폴은 올해로 28년 차 뮤지션이다. 10여 년 전 제주도에 정착한 뒤 홈쇼핑으로 귤과 앨범을 판매하기도 하고 주변에서 채집한 자연의 소리로 실험적 앰비언트 뮤직을 발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음반 대신 스트리밍 폴랫폼과 유튜브로 음악을 듣는 시대에 2~3년마다 꾸준히 정규앨범을 발표하는 ‘귀한’ 뮤지션이기도 하다.
그는 “2~3년에 한 번씩 정규앨범을 내다보니 그 시간 동안 보여주고 싶은 것, 들려드리고 싶은 것이 쌓인다. 그 시간의 기록을 싱글이나 EP로 담기는 어렵더라”며 “익숙한 포맷이기도 하고, 저에게는 기록이고 뮤지션으로 걸어가는 발자국 같은 거라 앨범을 내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 소속사 안테나와 희열이형(유희열)의 전폭적인 믿음과 지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루시드폴은 오는 28~30일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ECC 영산극장에서 단독 공연 ‘2025 루시드폴 11집 발매 공연 ‘또 다른 곳’을 개최한다. 음원과 LP로 발매된 이번 앨범은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에게 CD로도 판매될 예정이다.
“회사원들이 매일 아침 출근을 하듯, 카페를 하는 제 친구가 새벽마다 카페에 나가 커피를 볶듯, 저 역시 음악 하는 사람으로 꾸준히 음반을 내며 살자고 다짐한 적이 있어요. 아직까진 그 다짐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그렇게 살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