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뒤, 가톨릭맹인선교회에서 중증 시각장애인 남편을 우연히 만났다. 1990년 결혼에 골인하자마자 시동생·시부모가 있는 경기 남양주 시댁에 맏며느리로 들어갔다. 중풍이 온 시아버지 간병을 3년여간 도맡다가 먼저 떠나보냈다.
올해 95세인 시어머니는 낙상으로 거동이 어렵고 기저귀도 차야 하지만, 늘 그랬듯 곁에서 묵묵히 챙긴다. 그래도 "많이 힘들었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8일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제53회 어버이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석류장)을 받은 70세 김혜원씨 이야기다. 김씨는 효행 실천과 노인 복지 기여를 인정받아 이날 유일한 훈장 수상자가 됐다. 그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훈장을 받게 되니 어머니가 '장하다'며 좋아하셨다. 요즘 들어선 '우리 큰며느리 같은 사람 없다'는 표현도 종종 하신다"고 말했다.
하나뿐인 아들의 결혼으로 김씨는 며느리이자 시어머니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마음가짐은 35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세상 어려운 게 고부(姑婦) 관계라지만, 식사는 남편을 포함한 세 식구가 식탁에 꼭 모여 먹는다. 또한 아픈 어머니를 위해 마루에 모여 두런두런 일상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그는 "시어머니 역할보다 며느리 역할이 더 편하다"면서 "이번 주 연휴에 일이 없어 집에 있으니 어머니가 너무 좋아하시더라. 우리 어머니도 며느리랑 있는 게 편하신 거 같다"며 웃었다.

어느덧 일흔이 된 '효부'의 효행론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김씨는 "부모님 의중을 살피는 게 우선이다. 원하시는 게 뭔지 챙겨만 드려도 어르신들이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이젠 김씨처럼 한집에서 시부모나 부모를 모시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가족이란 울타리가 줄어들고 효도의 의미도 점차 옅어지는 시대, 조심스레 하고픈 말을 꺼냈다.

김씨의 효행은 집 문턱을 훌쩍 넘어섰다. 집을 나서면 '대한노인회 경기 남양주시지회 취업지원센터장'이란 직함을 단다. 어려운 어르신들을 도우려 한글 강사를 맡기도 했고, 지금은 편의점·미용실 등 노인 일자리 창출에 열성이다. 이런 활동을 20년 넘게 이어왔다. 그는 "앞으로 조금만 더 열심히 뛰면서 어르신들에 일하실 기회를 드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김씨가 수십 년째 가슴 속에 되뇌는 성경(마태복음) 구절이다. 평소 타인을 대할 때 적용하는 신념이기도 하다. 스스로 '오지랖 넓다'고 표현한 그는 "나만 사랑을 받자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남에게도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면서 "조금 모자라는 어르신에겐 밥도 드리고, 차 한잔도 정중히 대접하려고 한다. 그런 분이 집에 오셔서 우리 아이한테 건네준 1000원이 100만원보다 크게 느껴지더라"고 말했다.
이번 수상은 김혜원씨 가족엔 '겹경사'다. 지역사회 시각장애인 복지 증진에 힘써온 남편이 지난해 장애인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올해 김씨가 뒤이어 훈장 대상이 됐다. 그는 "남편이 '큰 상 받았다 생각했는데 이 상이 훨씬 크다'고 말해줬다. 부부가 상을 받는 게 흔치 않을 텐데, 그동안 희생하면서 살아온 게 보상받는 느낌"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