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 진보’ 탈피하려 친트럼프적 행보
‘주지사 패싱’ 주방위군 투입에 물거품
“그들이 원하는 광경 보여주지 말아야”
시위대 일부 “평화 유지하자” 호응 시작

미국 민주당의 차기 대권 주자 중 한 명인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로스앤젤레스(LA) 이민자 대규모 단속 사태를 계기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됐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 지지층을 끌어안기 위해 최근 들어 중도적 행보를 보였으나 이번 사태는 그를 트럼프 대통령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느냐, 아니면 유력 대권 주자로 우뚝 서느냐의 갈림길로 밀어 넣었다.
미국 ‘진보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뉴섬 주지사는 자신의 진보 색채를 완화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주 지지층인 저학력 노동계층의 민심을 사로잡는 데 주력해왔다. 민주당 지지층의 격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운영하는 팟캐스트의 두 번째 출연자로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인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 전략가를 초대한 것이 단적인 예다.
자신을 ‘뉴스컴(Newscum·뉴섬과 쓰레기의 합성어)’이라 조롱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월 대형 산불 발생 후 캘리포니아를 방문했을 때는 공항 활주로까지 나가 반갑게 맞이했다. 심지어 뉴섬 주지사는 트랜스젠더 운동선수들이 여자 스포츠 경기에 참여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주장하며 민주당의 다양성(DEI) 정책에 반기를 드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가 내민 화해의 손길은 물거품이 되기 직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뉴섬 주지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8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300명을 LA에 배치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주방위군 2000명을 LA에 투입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 대통령이 주지사의 요청 없이 주방위군을 동원한 것은 1965년 당시 린드 존슨 대통령이 민권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앨라배마에 군대를 보낸 이후 처음이다.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은 주방위군 투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LA를 폭력과 반란의 도시로 묘사하고 있다. J D 밴스 부통령은 시위에 참여한 멕시코 이민자 일부가 멕시코 국기를 흔든 것을 두고 “외국 국기를 든 반란군이 이민법 집행관을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폭스뉴스도 불타는 자동차와 타이어 이미지를 반복해서 내보내며 LA가 ‘통제 불능의 도시’가 됐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격화됐던 시위는 7일 밤이 되면서 조금씩 진정되는 분위기였고, 오히려 주방위군의 투입이 새로운 충돌의 도화선이 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뉴섬 주지사는 지난 7일 주민들에게 이례적인 호소문을 발표했다고 LA타임스는 보도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분노를 자극해 반응을 끌어내려 하고 있다”면서 “그들은 폭력을 원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정치적으로 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이민 단속에 항의하는 LA와 전국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광경을 보여주지 마십시오”라고 간청했다.
LA타임스는 뉴섬 주지사의 이 같은 메시지가 캘리포니아 정치인들과 이민자 권리 옹호 단체들이 놓인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연방 정부의 폭력적인 단속에 분노하고 있지만 동시에 트럼프 정부가 LA에 ‘폭도들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덧씌워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고 미국 국민을 설득하는 데 성공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UCLA) 공공정책연구소 소장인 마이크 보닌은 “이번 사태는 우리가 어떻게 이 문제에 맞서 싸우고 우리 주민들을 보호하고 그들(트럼프 정부)의 손에 놀아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팽팽한 줄타기”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8일 시위 현장에선 캘리포니아 주정부 공무원들이 ‘정치적 이미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 외쳤으며, 시위대 일부가 이에 호응하기 시작했다고 LA타임스는 전했다. 멕시코 국기를 흔들며 시위대의 거리행진에 참여한 줄리 솔리스는 주위 참여자들에게 “평화를 유지해달라”고 촉구하면서 “그들은 체포를 원하고 우리가 실패하는 걸 보고 싶어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