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보류’로 심의없이 조사중지된 진실화해위 과거사 사건만 368건

2025-05-23

1950년 11월1일, 당시 12살이었던 박모씨(87)는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다. 좌익활동을 한 가족의 행방을 추궁하는 경찰의 질문에 박씨의 아버지가 ‘모른다’고 하자, 경찰은 ‘부역자 색출 시범을 보인다’며 마을 주민들 앞에서 아버지를 총살했다. 경찰은 아버지를 새끼줄로 묶어 저수지 너머로 끌고 갔고, 가족들이 직접 시신을 수습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소위원회에 상정되지 못했다.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이 ‘보류(상정불가)’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제적등본상 사망신고가 안 됐고, 참고인이 직계 가족이라는 이유였다. 결국 이 사건은 상임위원 퇴임 이틀 전 조사중지 처리됐다.

2기 진실화해위가 오는 26일 조사기한 종료를 앞두고 있지만, 400건에 달하는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 ‘묻지마 보류’ 끝에 조사중지 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진실화해위원회지부가 23일 공개한 자체조사 결과를 보면, 최근 진실화해위가 조사중지 결정한 2116건 중 368건은 조사결과보고서가 완성됐는데도 소위원회에서 심의조차 받지 못하고 보류되다가 조사중지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96%는 군·경 관련 사건(353건)이었다. 군·경에 의한 연행, 총살 현장 목격, 시신 수습 등 구체적인 희생 사실을 증언하는 진술이 확보됐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자의 제적등본상 사망일자가 없거나 다른 기록과 차이가 난다는 것이 주된 보류 사유였다. 노조는 “이런 보류 지침이 과거사의 특수성을 간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과거 군·경에 의해 실제 희생됐어도 가족들이 연좌제를 우려해 사망신고를 하지 않거나 늦게 할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사정 등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민간인 학살의 주체인 국가기관의 기록을 근거로 최종 조사중지한 사례도 있다. ‘진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이 대표적이다. 1950년 한국전쟁기 전남 진도군에서 군·경은 주민 수백명을 ‘좌익 부역자’로 지목해 처형했다. 희생자 중에는 어린 청소년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사망 19년 뒤인 1969년 진도경찰서가 작성한 사찰기록에 ‘암살대원’으로 지목됐다. 이들이 암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진술을 다수 확보했고, 가해자인 국가기관의 기록에 대한 비판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외부 전문가 자문이 있었지만 이 기록은 이 사건을 보류하는 근거로 활용됐다. 진도 사건도 결국 조사중지 의결됐다.

진실화해위 조사 과정에서 유족의 증언을 위축시킨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됐다. 노조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진실화해위 조사1국은 유족들이 허위로 신청하거나 거짓 증언을 하면 과태료를 부과받을 수 있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한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인들이 적극적으로 진술하기 힘든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노조는 소위원회 안건 상정과 심의에 관한 명확한 기준과 절차를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또 이념 편향 논란을 막기 위해 진실화해위 위원 구성의 다양성과 중립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헌법정신과 과거사법 입법 취지를 부정하는 인사를 배제할 것도 요구했다. 노조는 “진실화해위 위원이 특정 이념에 치우쳐 법으로 보장된 독립성과 권한을 과도하게 사용해 피해자의 권리를 해치는 문제가 있었다”며 “위원회는 피해자들의 한 맺힌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실을 밝힐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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