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2025-09-01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지난 24일, ‘힐리스’라는 단어를 떠올린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바퀴 달린 신발 이름이다. 22년 전, 한진중공업 크레인에서 투쟁 중이던 김주익씨가 목숨을 끊었다. 회사가 노조에 제기한 150억원 손해배상 소송으로 그의 월급은 물론 집까지 가압류를 당했다. 그는 유서에 “아이들에게 힐리스를 사주겠다 약속했는데 못 지켜 미안하다”고 적었다.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1985년 출간한 저서 <경제민주주의에 관하여>에서, 초기 자본주의 미국 기업들이 주주 자본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원리를 따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주주 이익 극대화에만 골몰한 기업 권력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시민의 삶과 공동체적 가치, 나아가 민주주의적 질서까지 위협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노란봉투법이 통과된 이 시점에 1980년대를 돌아본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한국 노사관계는 대전환기를 맞았다. 수십년간 누적된 노동자들의 울분이 터져 나온 결과였다. 이때 기업들은 그저 끌려가기만 한 건 아니다. 정규직 노조와는 단체교섭을 성실히 하는 한편 비정규직과 다단계 하청 구조를 활용해 비용 부담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때 기업들이 다른 방향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본래 노동 3권은 제헌헌법부터 보장돼 있었는데 지켜지지 않았다. 이제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했으니 입헌주의에 걸맞은 경영이 필요하다고,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근로조건을 개선해 나가면 기업 경쟁력도 높아질 테니 진정성 있게 교섭해 나가자고 결단했다면 어땠을까.

많은 기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교섭을 회피할 방법에만 골몰했다. 노조 설립의 낌새만 있어도 직원 가족까지 감시하고, 서로 반목하도록 회유하고, 어용노조를 만들고, 선제적으로 직장폐쇄를 한 뒤 그 손해를 물어내라며 수십억, 수백억원짜리 소송장을 던졌다. 그 소송장이 사람을 죽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던졌다. 이 방법도 공짜는 아니었다. 노조 파괴 컨설팅 노무법인, 소송 담당 법무법인에 지불해온 돈이 수십억, 수백억원일 것이다. 그 돈을 차라리 노동자의 신뢰를 얻는 데 썼다면 어땠을까.

이제는 그런 식으로 할 수 없다 하니 기업들 불만이 크다며, 대체 어디까지 교섭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탄한다고 경제단체들은 전한다. 해법은 간단하다. 노동자가 성실히 일해주기 원하는 만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면 된다. 노동자를 착취해서 이윤을 남기려는 하청업체와는 계약하지 않으면 된다.

진작 그랬다면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힐리스라는 단어를 가슴 아프게 떠올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김주익씨 자녀들조차 어린 시절 아빠가 사줘서 신나게 즐겼던 그 신발의 추억을 거의 잊었을 것이다. 그 뒤로도 아빠와 보낸 행복한 날이 많았을 테니까. 그렇게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던 아이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이제라도 기회가 왔다. 그동안 경제단체들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들에 대해 “떼쓴다”는 표현을 써왔는데, 이제 그 말을 돌려주고 싶다. 더 이상 떼쓸 때가 아니고, 한국 사회에 좋은 기업이 되기를 결단해야 할 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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