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번역원에서 지원하는 해외 한국학대학 번역 실습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다. 내일은 지난 3월부터 내 시집을 가지고 번역 실습을 한 러시아 교수와 학생들에게 강연해야 한다. 모스크바에서 한국학을 가르치시는 M 교수님 덕분에 대학교와 가까운 곳에 있는 호텔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말하는 일을 제법 오래 해왔지만, 아직도 그것이 익숙하지 않다. 그때그때 청중이 달라지고, 그들이 강연에서 원하는 바도 각기 다를 것이다. 고마운 것은 이 익숙지 않음이 내게 자극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낯선 길에 내딛는 첫 발짝이 주는 설렘과 두려움처럼.
지난 4월, M 교수님을 서울에서 처음 만났다. 합동 강연이 끝나고 M 교수님과 함께 이동하는 길이었다. 지도를 보고도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는 걸 눈치채신 M 교수님은 내가 길눈이 어둡다는 걸 단박에 간파했다. “서울 참 복잡하죠?”라는 그의 물음에 “지도를 그리는 중이에요” 같은 시답잖은 대답을 하기도 했다. 그 말이 갖는 중의성을 파악했던 것일까. M 교수님이 크게 웃었다.
“실은 저도 길이 자주 헷갈리거든요. 아까 조금 늦은 것도 길을 헤매다 그랬어요.” M 교수님이 대학교에서 도보로 5분 걸리는 호텔을 예약한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혹시 길을 잃더라도 오래 헤매지 않고 돌아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리라. 또한 GPS 오류가 자주 발생하는 현지 사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3년이 넘게 흘렀고, 침공이 전쟁이 되고 알다시피 양국의 갈등이 점점 심화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와주셔서 고마워요.” M 교수님이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실은 이 자리에 오는 데 마음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도 이것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어떤 것도 명분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 명백해졌다. “문학은 약자의 시선으로 시작되고 약자의 언어로 완성되잖아요. 그 약함으로 길을 내지요. 없는 길은 새로 만들고 이따금 구멍 난 길은 메우기도 하면서요.” 천천히 말하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말이 향하는 곳을 알아챈 것일까. M 교수님이 환히 웃었다.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탈 때 시간이 촉박했다. 여유가 없으면 가뜩이나 어두운 길눈이 더 깜깜해진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도리질을 하는데 한 남자분이 말씀하셨다. “마스끄바? 위드 미, 위드 미.” 아무래도 상하이까지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신 분 같았다. 다급한 상황인지라 무작정 따라갔다. 어린 시절 사탕을 주는 아저씨를 따라가면 안 된다고 배웠지만, 배고픈데 사탕밖에 먹을 게 없을 때는 별수 없이 그거라도 먹어야 한다. 그의 선의 덕분에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어떤 길에도 손이 있다. 어쩌면 먼 길 가는 나그네인 ‘길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손길’일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 M 교수님과 식사하는데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피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맞은편의 누군가가 총명한 할머니가 되고 그 할머니가 다시 ‘안나’라는 이름의 사람이 되는 상상을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사이좋게 웃고 있었다. 힘을 합쳐 길을 트고 닦듯, 그 길에 기꺼이 함께 깃들듯. 모든 길이 그렇듯 사람이라는 길 또한 쉽게 열리지 않는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르는 것처럼,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인 것처럼.
머릿속에 길이 나기 시작하는데 M 교수님이 말한다. “시집을 읽고 한국어를 끝끝내 사랑하는 시인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저도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사랑해요.” 모스크바 시내 한복판에서, 나는 내 길을 발견한 것 같았다. 믿음이 있으면 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고 어디서든 다시 나타나 손을 뻗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