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금융신문=안종명 기자) 미국은 “유럽이 러시아 가스를 완전히 미국산 가스로 대체한다면, 미국도 대러제재를 강화할 수 있다”며 부추겼지만, 유럽은 원가부담 때문에 값싼 러시아산 가스를 끊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관측된다.
이미 우크라이나 분쟁이래 유럽에 액화천연가스(LNG)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려온 미국은 이런 유럽의 약점을 활용, 자신들은 역으로 러시아 제재를 풀어 유전・가스전 공동개발과 북극항로 공유 등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에 새로 개발될 에너지 장기 대량수출을 꾀하고 있다.
◇ 미국 “유럽이 러시아 에너지 아예 안 사면 대러 제재 강화”
지난 11일(워싱턴 시간) 현재 유럽 출장 중인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아래 사진)은 “미국과 유럽연합(EU)간 무역협정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산 액화천연가스(LNG)와 휘발유, 경유, 항공유를 미국산 수출로 전량 대체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 국가들이 미국 에너지 7500억 달러어치 수입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지”를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라이트 장관은 지난 8일 “EU가 러시아산 석유 및 가스 수입을 중단할 경우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 종전을 반대하며 군사재무장을 통한 러시아 대적 총력전에 나선 EU로서는 미러협력을 막기 위해 어떤 손해도 감수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미국의 발표가 더 솔깃한 상황이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아래 사진)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27일 상호관세 30% 대신 8월1일부터 미국으로 수입되는 유럽산 상품의 약 75%에 대해 15%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합의했다. 동시에 EU는 미국산 상품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했다. EU 집행위원회는 특히 모든 유형의 러시아 에너지 수입을 완전히 금지하고, 75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석유, 가스, 원자력 장비 및 연료를 구매하는 동시에 미국 경제에 60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미국 석유 및 가스 대기업 엑손모빌은 실제 유럽연합(EU)이 75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 수입의 일환으로 유럽에 액화천연가스(LNG)를 공급하는 장기계약을 체결할 전망이라고 발표도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즈(FT)>는 지난 10일치 보도에서 엑손모빌 LNG 부문 수석 부사장 피터 클라크를 인용, “2025년초부터 유럽의 LNG 수입량이 전년 대비 약 20% 증가했으며, 그중 55%가 미국산”이라고 보도했다.
◇ 유럽이 러시아 가스를 끊을 수 있을까?…미국은 그 정답을 안다
하지만 EU가 미국의 요청대로 2027년까지 러시아산 화석연료를 미국산으로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등 러시아산 에너지에 크게 의존해온 나라들 때문이다. 페테르 시야르토 헝가리 외무장관은 11일(부다페스트 시간)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 없이는 헝가리와 슬로바키아가 에너지 공급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로부터 석유와 가스를 공급받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유럽 스페인의 경우 최근 들어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외려 높아진 상황이다. 스페인 정부는 현 EU 내각의 반러 정책에 반발하는 정서가 가장 강한 나라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대부분 터키스트림 등 우회적인 방식으로 수입되는 러시아 에너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미 바이든 행정부이래 반러시아 행보를 강화해온 유럽 정치인들은 에너지 정책의 실패(가격폭등)로 여론의 지지를 거의 상실한 상황이다. EU 집행위원장의 모국인 독일에서조차 우크라이나 분쟁 와중에 파괴된 노르트스트림2(독일과 이어진 러시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를 복구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랄프 니마이어 독일 헌법·주권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6일(블라디보스토크 시간) 동방경제포럼 현장에서 <타스> 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독일 산업은 위기에 처해 있으며 러시아산 가스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독일은 노르트스트림 복구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독일 현지 여론을 전했다.
미국이 이런 상황을 모를 리가 없다. 유럽이 러시아 에너지를 100% 끊을 수 없다는 점은 역으로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풀 빌미로 삼을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특히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가성비를 높이기 위해 가스전 개발이나 가스파이프라인, 액화플랜트, LNG 운반 쇄빙선, 항행 안보 등 굵직한 에너지과제들을 러시아와 협력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대신 유럽과 한국, 일본 등 동맹국들에게는 이렇게 러시아와 공동개발한 에너지를 장기계약으로 대량구매하라고 압박하는 형국이다. 기껏해야 프로젝트에 재무적 투자자 지위로 프로젝트 참여를 제한하면서 관세, 방위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 동맹국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러시아 연일 “미국과 알래스카 가스전 개발 협력할 게 많다” 언급
미러가 에너지협력, 구체적으로 알래스카 LNG 사업에서 협력할 것이라는 관측은 러시아에서 흘러나오는 알래스카 LNG 관련 논평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5일(현지시간) 극동 연해주 주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 10차 동방경제포럼(EEF)에서 “알래스카에 자원이 있고, 가스 채굴 및 액화에 효과적인 기술을 보유한 러시아는 알래스카에서 미국 기업과 협력할 좋은 제안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와 미국이 북극에서 공동으로 작업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사흘 뒤인 8일(모스크바 현지시간)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모스크바국립국제관계대학교(므기모, MGIMO) 학생들과 만난 자리에서 “러시아와 미국이 ‘여기(러시아)’와 ‘알래스카’ 모두에서 공동으로 LNG 생산을 수행할 수 있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러시아 천연자원환경부 외청인 연방지하자원이용청(로스네드라, Rosnedra)은 동시베리아와 극동지역, 구체적으로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북부와 야쿠티아 지역에서 탄화수소(석유와 가스) 탐사를 유망한 프로젝트로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올렉 카자노프 로스네드라 청장은 9일(현지시간) <타스>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에는 약 950억 톤의 탄화수소 자원이 있는데, 그중 거의 절반이 우랄 연방관구와 볼가 연방관구 등 전통적 생산지역에 위치하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극동지역에서 미국과의 에너지협력이 성사되든 무산되든, 지정학(Geopolitics)을 고려한 큰 그림도 그리고 있다. 2024년 6월19일 북러군사협약(포괄적전략동반자 조약)을 맺은 뒤 경제협력에 속도를 내고 있는 가운데, 당장 북한에 러시아 전기를 대량으로 직접 지원하고 있다. 향후 가스관을 통한 천연가스 공급도 점쳐지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5일 동방경제포럼(EEF) 본회의 종료 직후 올렉 코제먀코 연해주 주지사와 만나 지역경제현안에 대해 숙의했다. 코제먀코 주지사는 이날 “220킬로볼트 전력선이 북한 국경까지 연장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런 계획이 모두 푸틴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면서 “북러 접경인 하산 구역에 이미 3개의 국경 출입구가 있다”고 언급했다. 북극항로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는 러시아가 시베리아와 우랄에서 에너지 개발에 나설 경우 북한은 주요 러시아 에너지 수요처가 될 전망이다.
◇ 미러 에너지 협력 가능하다…알래스카 정상회담의 상징적 의미
미러 에너지협력은 우크라이나 협상 중 미국이 먼저 러시아에 제안했다. 지난 8월26일 미 <로이터> 통신은 앞서(8월15일) 알래스카에서 열렸던 미러 정상회담을 보도하면서 “엑슨모빌이 ‘사할린-1’ 프로젝트에 복귀할 가능성이 논의됐고, ‘Arctic LNG-2’를 포함한 러시아에 대한 미국 장비 판매 문제가 제기됐다”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또 “미국이 러시아 핵 쇄빙선을 구매하는 방안도 고려됐다”면서 “워싱턴은 평화협정과 제재 완화 유인책으로 에너지 프로젝트를 활용하려 했다”고 논평했다. 특히 “워싱턴은 모스크바가 중국 대신 미국 기술을 구매하도록 설득해 러시아와 베이징의 관계를 약화시키려 했다”고 덧붙였다.
러시아는 엑슨모빌 같은 지구촌 최대 에너지기업이 보유한 에너지 기술과 장비 등을 공유하는 한편, 천연가스 액화 기술과 오랜 동토층 에너지 개발 경험 기술을 통해 알래스카 LNG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 특히 미국에 월등히 앞서 있는 핵추진 LNG 운반 쇄빙선 기술 지원, 북극항로를 통한 알래스카 LNG 유럽 수출 보조 등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는 미러간 에너지 협력이 성사된다면, 한국과 일본의 셈법이 복잡해 진다. 가스파이프라인(포스코 등)이나 액화플랜트 등 건설공사(한화 등) 수주에 관심이 있는 한국 기업들, 역시 파이프라인에 필요한 철강 공급에 이해관계가 있는 일본 기업들도 미러의 협력에 따라 사업참여가 제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래스카 LNG 사업 최대 주주인 글랜파른은 러시아의 프로젝트 참여 가능성을 묻는 본지의 공식 질문에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2일(현지시간) 코노코필립스 앵커리지 사무실에서 본지와 만난 조 코타르스키(Joe Kotarski, 아래 사진) 수석고문은 미러 에너지 협력 가능성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비즈니스는 정치와 달리 국가간 공존하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겹치기도 한다. 미러 관계는 현재 좋지 않지만 개선될 수 있다”고 낙관적 메시지를 줬다. 폴란드 출신인 그는 러시아에서 에너지프로젝트를 한 경험도 있다. 그는 “앵커리지에는 아직 러시아 정교회가 있고, 가끔 러시아어를 들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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