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권 보안기술로 인왕제색도 ‘뚝딱’…요판화 장인을 아시나요

2024-10-22

비 갠 뒤 안개가 피어오른 인왕산의 경치를 호방한 붓놀림으로 담아낸 겸재 정선(1676~ 1759)의 ‘인왕제색도’. 2021년 국가에 기증된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국보 산수화다.

한국조폐공사 디자인연구센터 소속 신인철(57) 연구원은 지난 1월부터 석달 동안 인왕제색도를 수십만개의 점과 선으로 해체·재구성해 그렸다. 다시 석달간 이 밑그림을 특수합금판에 일일이 옮겨 새기고 깎아냈다. 이렇게 완성된 요판(凹版, 오목판)에 잉크를 바르고 종이를 눌러 찍자 기암괴석의 농담(濃淡, 짙고 묽음)이 절묘하게 구현된 ‘인왕제색도 요판화’가 탄생했다.

요판인쇄란 한국조폐공사가 은행권을 찍어낼 때 쓰는 고도의 인쇄기법이다. 지폐(천원, 오천원, 만원, 오만원) 표면을 만질 때 오톨도톨 느껴지는 촉감이 이 특수기술 때문이다. 오만원권의 경우 화폐인물인 신사임당의 초상과 ‘50000’이란 숫자, ‘한국은행 오만원’ 등 글자에 적용된다. 이와 함께 특수 보안잉크 등이 사용돼 위변조 복제가 불가능한 게 특징이다. 인왕제색도 요판화에도 이 같은 화폐 보안기술이 총동원됐다.

지난 17일 인왕제색도 요판화가 시중에 예약 판매되기 시작한 날, 조폐공사 상품을 전시·판매하는 서울 마포구 오롯디윰관에서 신 연구원과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한 가성현(55) 책임연구원을 함께 만났다. 요판작업은 1㎜도 채 되지 않는 미세한 선과 점을 구사해야 하고 화폐 보안기술과 직접 연관돼 있어 전수가 제한적이다. 조폐공사 안에서도 이들만 ‘장인’급으로 구사 가능하다고 한다. “후배 두 명이 있지만 아직은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단계”라고 했다.

이날 대형(824*546㎜) 300점, 중형(526*356㎜) 500점, 소형(310*196㎜) 2000점이 한정 출시된 인왕제색도는 조폐공사와 한국박물관문화재단을 통해 예약 접수를 받자마자 빠르게 팔려나가고 있다. 대형과 중형 버전엔 이번 실무를 담당한 신 연구원의 서명과 일련번호가 표시된다. 소형 버전은 MZ세대의 호기심을 겨냥해 현미경급 렌즈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미세문자와 인왕산 호랑이 그림 등을 심었다. 가 연구원은 “나도 한 점 사야 하는데 이러다 매진되겠다”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1996년 나란히 공채 입사한 이들은 원래 서양화를 전공한 미대 출신이다. 대전시 초대작가(신인철) 등 개인 이력도 있지만 대표작은 우리 지갑 속에 있다. 신 연구원은 2005~2006년 새은행권 제작 때 천원권과 오천원권 초상을, 가 연구원은 같은 기간 오천원권 초충도와 2008~2009년 오만원권 초상(신사임당)을 담당했다. 표준영정을 기준 삼아 화폐 용도의 원화를 그린 뒤 요판 공정을 마칠 때까지, 한 사람이 개별 ‘작품’을 전담하는 구조다. 완성된 화폐 요판은 엄중한 보안 속에 관리되기 때문에 이들도 제 손을 떠나 보낸 뒤 다시 못 본다. 이 밖에도 조폐공사가 찍어내는 각종 백화점 상품권과 평창동계올림픽(2018) 기념은행권 등 기념지폐의 요판화를 담당한다.

두 사람이 동서양 명화를 요판화로 작업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 홍보·기념품 용도로 이중섭·박수근의 대표작과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등을 선보여서 호응을 얻었다. 인왕제색도는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측과 협업해 우리 문화유산을 소재로 상품화에 나선 첫 사례다.

‘이건희 컬렉션’ 순회전시 때 원화를 감상했다는 신 연구원은 “비 온 후 운무(雲霧) 표현이 가장 고민스러웠는데, 밝은 부분은 점과 점 사이 간격을 넓게 했고 어두운 부분은 촘촘하게 새기면서 잉크가 많이 스며들게 작업했다”고 말했다. “잉크와 먹의 유사성 때문에 서양 채색화보다 한국 수묵화가 요판화에 훨씬 잘 맞는 것 같다”고도 했다.

“눈알이 빠질 정도로” 반년 이상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명화 요판화 작업이지만, 별도 인센티브는 없다. “그저 한국 문화를 더 널리 알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보람이 크다”(신 연구원)고 했다.

“요판화는 일반 인쇄물과 달리 만졌을 때 특유의 촉감이 있고 화폐 보안기술이 적용돼 복제가 불가능하단 특수성이 있어요. 판화의 에디션 개념을 우리 문화유산에 접목시키면서 희소성을 높일 수 있죠.”(가 연구원)

조폐공사는 앞서 특정 스타의 팬덤을 겨냥해 요판화를 적용한 ‘손흥민 메달’ ‘BTS 지폐형메달’ 등을 선보여 완판시킨 바 있다. 우진구 홍보실장은 “신용카드와 모바일페이 등이 확산하면서 지폐를 찍어내는 게 예전같지 않아서 조폐공사 나름의 새로운 매출 창구를 찾는 셈”이라고 말했다. 인왕제색도 요판화의 경우 수익 일부를 국가유산 보존을 위한 기금으로 쓰게 된다. 조만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요판화도 제작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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