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초(草)에는 ‘풀’과 더불어 ‘거칠다’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손질하거나 가공하기 전의 날것 상태를 뜻한다. 그래서 실무자가 처음 대강 잡아본 기획안을 초안(草案), 작가나 신문 기자가 방금 써서 아직 제대로 가다듬지 않은 원고를 초고(草稿)라고 각각 부른다. 초안은 여러 윗사람들의 검토와 첨삭 등 수정 과정을 거쳐 최종안이 된다. 초고도 마찬가지다. 문학 작품이라면 편집자나 교열자의 교정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신문 기사의 경우 데스크의 데스킹이 끝나야 비로소 지면 제작 부서로 보내진다.

그러니 사초(史草)는 말 그대로 ‘거친 역사’다. 그 자체로는 역사가 아니지만 장차 역사를 편찬할 때 핵심 자료가 되는 기록이다. 한국, 중국, 일본 등 한자 문화권에서 옛 왕조의 역사는 실록(實錄)으로 불렸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록한다’라는 뜻이다. 이 실록의 기초가 되는 원자료가 바로 사초인 셈이다. 국왕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사관(史官)이 배석해 회의 참석자들의 발언을 적어 사초로 남겼다. 조선 시대 사관들의 역사 의식은 철두철미했다. 그들이 쓴 사초는 임금도 볼 수 없었다. 행여 권력자에게 유리하게 역사가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박근혜정부 초반에 이른바 ‘사초 게이트’가 터졌다. 발단은 2007년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한 노무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의사를 밝혔다는 일각의 의혹 제기였다. 진위를 확인하겠다며 여야 의원들은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진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원본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정작 기록원에는 그런 문건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두고 “사초가 사라졌다”며 여야 간에 공방이 벌어졌으나,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무의미한 정쟁으로 끝났다.

12·3 비상계엄 사태를 수사할 특별검사로 조은석 전 감사원 감사위원이 지명됐다. 그는 13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사초를 쓰는 자세로 세심하게 살펴 가며 오로지 수사 논리에 따라 특별검사의 직을 수행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특검팀의 수사 결과가 훗날 계엄 사태를 평가할 역사책의 기초 사료가 될 것이란 점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조 특검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이던 시절 그 상관인 서울고검장을 지냈다. 잠시 감사원장 직무대행으로 재직하는 동안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을 둘러싼 각종 의혹 재감사를 지시하는 등 윤석열정부와 다소 껄끄러운 관계였다. 조선 시대에 사초는 임금님조차 열람이 금지됐다는 점을 명심하고 정치적 중립성을 엄수하며 공정한 수사 결과를 내놓길 바란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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