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조윤수 前 튀르키예 대사가 말하는 ‘성공한 대통령의 조건’
국가 흥망 좌우한 진보 리더 3인방 슈뢰더·차베스·룰라의 성공과 실패
독일은 개혁, 브라질은 성장, 베네수엘라는 파국으로 귀결 참고할 만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의 국가 리더십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경제는 코로나 사태 이후 연일 악화일로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2024년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시도로 민주주의는 훼손됐고 국론은 심하게 분열됐다. 이런 상황에서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은 어떻게 위기를 수습하고 국가를 이끌어 나가야 할까?
필자는 이에 대한 답을 독일, 베네수엘라, 브라질에서 찾고자 한다. 독일과 베네수엘라, 브라질은 모두 2000년대 진보 성향 지도자를 맞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 브라질의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그 주인공이다.
먼저 독일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어머니는 허드렛일을 하며 슈뢰더를 키웠다. 성장 과정에서 노동자의 어려움을 목도한 그는 젊은 시절부터 노동자 권익 증진에 적극적이었 다. 동시에 기업에 대해선 비판적이었다. 반면 그는 공동결정제도, 연대원칙, 일자리를 위한 동맹, 참여 민주주의 사회 등 노동자가 참여하는 독일식 사회 시장경제 시스템을 지지했다.
슈뢰더는 1998년 10월 총리에 오른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위기에 직면했다. 독일의 사회시장경제 모델이 큰 위기를 맞은 것이다. 경제성장률은 유럽 대부분 국가에 뒤처졌고 기업들은 도산하기 일쑤였다. 독일 사회복지 제도는 전후 사회 안정과 발전을 가져왔지만, 점차 발전의 장애요인이 됐다. 적은 노동시간에도 불구하고 노조는 근로시간을 단축하고자 했다. 이에 반해 기업은 높은 임금수준과 강력한 해고 보호 규정으로 신규 채용을 주저했다. 이는 심각한 실업문제로 이어졌다. 동·서독 경제를 균등화하는 정책목표에 따라 생산성이 부족한 동독 근로자의 임금이 통일 이후 5~6년 사이 10~12배로 상승하면서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돼 동독 산업은 붕괴된 상태였다.
국가의 몰락을 목도한 슈뢰더는 정치인으로서는 어려운 결정을 내린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노동시장을 개혁하는 ‘어젠다 2010’ 정책을 제안한 것이다. ‘어젠다 2010’ 주요 내용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민에게 실업급여와 기초생활 보장비를 통합해 최저생계비 이상을 지원하되, 다소 ‘불만족스러운 일자리’라 해도 우선 수락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다. 중소기업의 해고 절차도 간소화했다. 노동의 유연성을 높인 셈이다.

독일 슈뢰더 총리의 개혁: 어젠다 2010
독일 내부에서는 변화에 대한 열망은 높았지만, 막상 개혁이 시작되자 반대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슈뢰더는 정책에 반대하는 노조 집회에 직접 나가 정책을 설명하고, 당 대표직도 내려놓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개혁안이 의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개혁 정책 후유증으로 2005년 총선에서 패배,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이후 집권한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는 슈뢰더의 정책을 배척하기보다 오히려 충실히 시행했다. 그 결과 수렁에 빠진 독일 경제는 극적으로 반등에 성공했다. 슈뢰더는 이념보다 오로지 국익을 우선한 국가 지도자였다. 노동자의 권익 향상이 트레이드 마크였 던 슈뢰더가 총리 취임 직후 노동 계층이 결사 반대하던 개혁 정책을 추진한 것은 기름을 안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그 결과, 그는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지킨 것은 물론, 독일을 부흥하는 데 성공했다.
슈뢰더가 성공의 교훈을 남겼다면,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실패는 반면교사의 교훈을 준다.
차베스는 시골의 가난한 교육자 가정에서 7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나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한 환경에서 자랐다. 당시 베네수엘라는 부패한 정부 엘리트 관료들과 기업들이 국가의 부를 독점적으로 누렸다. 일반 대중에게 빈곤은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후 차베스는 군사학교에 입학해 남미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를 귀감으로 삼고 민족주의·사회주의에 심취한 군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점차 부패한 지도층을 비판하면서 비밀조직을 결사하고 1992년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해 구속됐다.
석방된 이후 1998년 대선에 출마한 차베스는 막대한 석유 자원을 활용해 나라를 재건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당선했다. 이후 2000·2006·2012년 대통령 선거와 헌법 개정 등 여러 차례의 국민투표에서도 내리 승리했다. 그 배경에는 기존 정치인에 대 한 불신과 더불어, 차베스가 부를 재분배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집권한 직후 베네수엘라의 정치·경제 제도를 크게 바꿨다. 행정부의 권한을 강화했으며, 입법부·사법부·언론을 사실상 무력화했다. 또, 빈곤 타파 및 소득격차 해소를 위해 ‘미시온’이라는 이름의 의료서비스, 문맹 퇴치 및 교육, 빈민층 식량 공급 등 사회복지사업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이를 위한 재원은 석유 수출로 조성한 ‘석유 기금’으로 상당 부분 충당했다. 황금알을 낳는 석유산업에 대한 재투자는 중단됐다.

또 국민을 대상으로 매주 일요일 ‘안녕, 대통령 각하(Hello President)’ 라는 일종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리더십을 미화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이데올로그(차베스주의, Chavismo)를 국민에게 주입했다. 부유층에 대한 빈곤층의 적대감은 갈수록 커졌고, 결과적으로 국민은 분열됐다.
14년 통치 기간 차베스는 국민의 입맛에 맞는 포퓰리즘 정책을 지속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유가가 하락하면서 차베스의 정치 실험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국가 기간산업은 무너지고 빈곤은 심화됐으며, 국민은 ‘베네수엘라 탈출’ 행렬에 동참했다.
같은 남미에서도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성공 사례로 꼽힌다. 룰라는 차베스와 유사한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룰라는 브라질 북동부 작은 마을에서 빈곤한 농촌 가정의 8형제 중 일곱째로 태어나 초등교육 4년이 전부일 정도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어린 시절부터 구두닦이, 세탁소 점원, 전화교환원으로 일했다. 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국가 기술연수원에서 기술을 익혀 선반공이 됐다. 기술 노동자로서 밤낮없이 일하다 새끼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도 당했다.
진보 대통령의 두 얼굴-베네수엘라의 교훈, 브라질의 성공
룰라는 소외된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기 위해 노조 활동에 뛰어들었는데, 1978년 불과 33세 나이에 98% 지지를 얻어 노조위원장에 당선되며 전국적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노조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사회 변혁을 이끌어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고 느껴 1980년 노동자당을 창당했다. 현실 정치에 뛰어든 그는 강한 노조 지도자의 모습으로 1989년, 1994년, 1998년 세 차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이에 2002년 대선에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중도 진영의 지지도 얻기 위해 기업인을 부통령으로 지목한다. 또, 상대 후보를 공격하기보다 자신이 당선될 경우 실행할 정책을 설명했다. 그 결과, 그는 지역·나이·성별 등 모든 계층으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취임 초기 외부에선 룰라를 ‘과격한 정치인’으로 바라봤다. 공직 경험이 없는 것은 물론, 경제·외교 정책이 불투명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외국인 투자자들도 빠르게 브라질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룰라의 강성 지지층은 국제통화기금과의 관계 단절, 외채 지급 중단, 중앙은행의 독립 반대, 금융시스템의 국유화 등을 요구했다. 지지층과 국가 주류 계층의 상반된 요구에 직면한 룰라는 실용적인 정책을 꺼내든다.
취임 이후 브라질 중앙은행 총재에 친시장 인사이자 전직 보스턴은행 총재를 임명해 정책의 급격한 변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잠재웠으며,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전임 정부의 안정적인 정책과 IMF가 제시한 전통적인 경제운용 방식을 일정 기간 유지하며 신뢰 회복에 치중했다. 동시에 점차 정부의 관여 폭을 확대해 최저임금을 인상했고, 소비 증가를 유도하면서 소득 재분배를 도모했다.
당시 소득 불균형은 국가적 최대 당면 과제였다. 이에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는 제도(보우사 파밀리아, Bolsa Familia)를 시행해 빈곤층에 대한 소득 지원을 꾸준히 전개했다. 가족 소득, 자녀의 수와 나이에 따라 현금 지원을 차등적으로 실시하되, 빈곤층 자립을 진작시키기 위해 자녀가 학교에 출석하도록 하고, 백신 등 예방주사를 맞도록 하는 조건을 부과해 교육·보건을 병행해 나가도록 했다. 또한 기아 퇴치를 위한 기아 제로(포미 제로, Fome Zero) 프로젝트를 통해 극빈층을 지원했다.
그의 정책은 7500만여 명의 빈곤층 가운데 3000만여 명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는 성과를 낳았다. 그 결과, 빈부격차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됐다. 그의 재임 중 브라질의 경제 지표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집권 8년간 평균 성장률은 4.5% 수준이었으며, 국가 채무는 GDP 60%에서 40%로 하락했다. GDP 순위도 전 세계 13위에서 7위로 수직 상승했다. 연임에 성공해 2010년 8년간의 대통령직을 마칠 당시 그의 지지도는 무려 87%에 달했다.
퇴임 이후 부패 혐의에 연루돼 투옥되기도 했으나, 역경을 극복하고 2022년 대선에서 승리해 현재 세 번째 임기를 수행 중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인플레이션, 환율 급락, 범죄 증가 등 문제도 있었지만 세제개혁·친환 경정책 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李대통령의 손에 달린 5000만 운명
위에서 살펴본 세 명의 진보 지도자는 흙수저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 삶의 궤적과 주장들이 이재명 대통령과 놀랍도록 겹치는 부분이 많다. 2000년대 전후 비슷한 시기에 집권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당시 그들이 직면한 국내외 상황도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녹록지 않았다.
슈뢰더가 집권한 1998년 독일 경제는 동·서독 통일 후유증과 사회복지 시스템 부작용을 심하게 앓고 있었으며, 차베스가 집권할 당시 베네수엘라는 기득권층의 부정부패로 빈곤문제가 심각했다. 룰라가 취임했을 당시 브라질은 IMF 지원을 받아 경제를 운영하는 상황에서 빈부격차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슈뢰더는 노동 개혁으로, 룰라는 시장정책과 정부관여정책 혼용을 통해 국가 발전을 이끌었다. 반면 차베스는 포퓰리즘 정책을 초지일관 견지했다. 그 결과, 국가는 나락으로 빠졌다. 독일·브라질과 달리 베네수엘라는 리더십의 실패로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급격히 쇠퇴했다.
물론 우리나라 상황은 위 세 지도자가 통치한 2000년대 환경과는 다르다. 그러나 대통령의 선택이 국가의 성쇠를 좌우한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이재명 대통령이 세 명의 지도자가 취한 정책과 그 결과를 정면교사 또는 반면교사로 삼아 국정을 성공적으로 통치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이 대통령의 선택에 따라 그 역시 후세의 정면교사가 되거나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늘 되새기기 바란다.
조윤수 前 주튀르키예 대사, 〈리더십의 성공과 실패〉 저술 swallow121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