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혜경 제주연구원 부연구위원/논설위원

최근 한 일을 겪으면서 ‘우격다짐(牛格打針)’이라는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우격다짐은 말 그대로 이성적 설득이나 합리적 논증 없이, 힘이나 억지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성격적 경향이 아니라, 합리성과 권력, 언어와 폭력, 윤리와 타자의 관계를 성찰하게 만드는 철학적 문제로 이어진다.
첫째, 합리성과 권력의 문제에서 우격다짐은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드러낸다. 이 개념은 근본적으로 이성적 설득의 부재를 전제로 한다. 칸트적 의미의 이성이란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보편적 판단 능력이라면, 우격다짐은 이러한 이성의 대화적 기능을 거부하고 주체의 확신을 타자에게 강요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에 따르면 합리적 사회는 담론적 합리성에 기반하지만, 우격다짐은 담론이 아닌 전략적 행위, 즉 타인을 수단화하는 행위로 전락한다. 결국 우격다짐은 합리적 근거의 결핍을 권력의 행사로 보완하려는 시도, 곧 이성의 퇴행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언어와 폭력의 관계에서 우격다짐은 언어를 의미 전달의 도구가 아닌 복종 유도의 수단으로 변질시킨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언어는 곧 권력’이라 하였듯이, 우격다짐은 언어를 통하여 타자를 지배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타자와의 대화 가능성을 차단하는 언어적 폐쇄이며, 곧 말을 하지만 대화하지 않는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우격다짐은 언어가 지닌 사회적 약속을 훼손하는 폭력적 언행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윤리적 관점에서 우격다짐은 타자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프랑스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사상가인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윤리란 타자의 얼굴 앞에서 생겨나는 책임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우격다짐은 타자의 얼굴을 보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투사하는 비윤리적 태도이다. 또한 칸트의 정언명령, 즉 “타인을 단지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는 원칙에도 위배된다. 결국 우격다짐은 타인을 설득의 대상이 아닌 제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비인격적 행위이다.
넷째, 실존적 차원에서 우격다짐은 종종 불확실성과 불안, 열등감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불안한 정체성을 억지 주장으로 감추려는 실존적 방어기제이며, 타인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자신을 확인하려는 나쁜 신념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따라서 우격다짐은 단순한 사회적 문제를 넘어, 존재론적 결핍의 표출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격다짐은 구조적 현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치에서의 포퓰리즘, 인터넷상의 여론몰이, 조직 내 상명하복 문화 등은 모두 제도화된 우격다짐의 형태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합의나 토론이 실종되고, ‘힘이 곧 정의’라는 신념이 강화된다. 그 결과 사회는 합리적 공론장이 아니라 감정적 충돌의 장으로 변모한다.
결국 우격다짐은 철학의 반대편에 서 있다. 철학이란 이유를 묻고, 근거를 제시하며,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이다. 반면 우격다짐은 이유를 묻지 않고, 근거 대신 억지를 내세우며, 타자의 말을 끊는 행위이다. 따라서 우격다짐에 대한 이러한 성찰은, 철학 그 자체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성찰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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