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물 진 뒤

2025-08-19

‘큰물 진 뒤’는 최서해 작가(1901~1932)의 1925년 단편이다. 제목대로 마을에 큰 홍수가 나서, 주인공 윤호는 갓 태어난 어린 아들을 잃는다. 그리고 슬퍼할 틈도 없이 출산 직후 찬물에 휩쓸려 병이 난 아내를 돌보다가 막노동이라도 해서 돈을 벌려고 나간다. 그러나 노동 현장에서도 윤호는 “꺼드럭꺼드럭하는 서울말”을 쓰는 감독에게 폭행과 폭언을 당한다. 그리고 일당도 못 받은 채 쫓겨난다. 이렇게 윤호는 극한 상황에 몰려 어떤 결단을 하게 된다.

최서해 작품들이 모두 그렇듯 이 작품도 더없이 강렬하고도 고통스럽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마을 전체가 ‘큰물’에 휩쓸리는 순간, 윤호가 아기를 안고 홍수에 휩쓸린 집을 목숨 걸고 빠져나가는 장면, 아기의 죽음 등 이어지는 참담한 사건들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작품 속 마을에 홍수가 난 원인은 새로 지은 철교였다.

마을이 물난리가 자주 나는 곳이라 농민들은 마을로 곧바로 향해 오던 물길을 건너편 산 아래로 돌려놓고 마을을 둘러 방축을 지어 단단히 관리하면서 잘 지내왔다. 그런데 마을 밖에 철도가 놓이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저편 산 아래로 돌려놓은 물은 철교를 지나서 이 마을 뒤 방축을 향하고 바로 흐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촌민들은 군청, 도청, 철도국에 방축을 더 굳게 쌓아주든지, 철교를 좀 비스듬히 놓아서 물길이 돌게 하여달라고 진정서를 여러 번이나 들였으나 조금의 효과도 얻지 못하였다. (최서해, ‘큰물 진 뒤’, <탈출기>, 애플북스, 151쪽)

2023년 7월 오송 지하차도 참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때도 주민들이 참사 전에 이미 미호강이 범람할 것 같다고 민원을 여러 번 넣었으나 지자체 대응이 부실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큰물’은 매년 어김없이 또 찾아온다. 정부는 7월 중하순에 내린 집중호우 피해액을 1조848억원으로 확정했다. 최근 10년간 자연재해 피해액 중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광주·전남 지역은 한 달 동안 내릴 비를 하루에 맞았다. 전남에 거주하는 비정규교수노조 위원장님에게 전화했더니 “논도 밭도 차도 다 잠겼지만 나는 괜찮다”고 처연한 답을 주셨다. 경남 여러 지역은 산불 피해를 입은 지 몇달 지나지도 않아서 또다시 홍수에 휩쓸렸다. 그리고 남쪽 지역이 물에 잠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수도권이 물폭탄을 맞았다. 차를 운전하던 사람들이 차째로 홍수에 휩쓸려 실종되고 사망하는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고향사랑기부제 ‘위기브’ 플랫폼을 통해 재해 지역에 성금을 보내면서 1980년대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시절 여름이면 학교에 반강제로 수해 이재민 돕기 성금을 내던 일이 생각났다. 5~6학년 정도 되자 왜 매년 홍수가 나는데 미리 대비하지 않고 수재민 돕기 성금만 걷는지 의아하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 ‘큰물 진 뒤’는 일제강점기가 배경이니 작품 속 ‘군청, 도청, 철도국’은 일본인들이 휘어잡고 있어 한국의 일반 농민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혹시 이런 식민지 방식의 강제적인 근대화, 중앙집권적인 권위주의의 영향이 100년이 지나도 남아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수해 피해 농가에 직접 도움이 되려면 성금을 보낼 수도 있지만 지역 특산물을 구매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수해에서 살아남은 강한(!) 상품들이고, 판매자가 철저히 점검해서 발송한다. ‘경남몰’에서 관련 행사를 하고 있다. 8월 한 달 동안 수해 지역 상품을 구입하면 5% 할인 쿠폰을 준다. 8월31일까지 광복절 특별할인도 진행 중이다. 전남 지역 특산품은 ‘남도장터’에서 판매하는데 여기도 여름휴가 특별전을 하고 있다. 지역별로 ‘맛뜰무안몰’ ‘장성몰’ ‘담양장터’ 등을 운영하고 있으니 원하는 지역 쇼핑몰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농축수산물뿐 아니라 소시지나 송편, 치즈 군고구마 같은 가공식품도 판매한다. (파인애플 군고구마, 몹시 유혹적이다.)

‘큰물’은 물론 큰불도 앞으로 피할 수 없이 계속 일어날 것이다. 기후변화를 당장 해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부는 최소한 어디를 어떻게 막아야 삶의 터전을 보호할 수 있는지 현지 주민들의 의견을 귀담아듣기라도 해야 한다. 도심의 재난 대책과, 논밭과 산의 기후변화 대책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빨리 내년을 대비해야 한다. 성금과 시혜는 기후변화 대책이 아니다. 일 터지고 나서 돈이나 보내는 지금의 방식은 절대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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