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적 경성
조윤영 지음
소명출판
“그때 음악회란 음악전문가들의 예술적 연주회가 아니라 서양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어릿광대들의 소기(素技, 꾸밈 없는 기술)에 지나지 못했던 것…”
한국 서양음악의 선구자 홍난파(1898~1941)가 1940년 5월19일자 신문에 쓴 칼럼 일부다. ‘그때’란 1915~20년 이 땅에 근대음악이 이식되던 시기다. 전근대와 근대가 뒤섞인 경성(지금의 서울)은 일본이 추종했던 서구 음악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혼마치(지금의 명동·필동 일대)의 악기상과 레코드 가게, 음악다방 등을 통해 도시는 점차 음악에 젖었다.

문화충돌이 없던 건 아니다. 마당놀이 같은 야외 연희에 익숙했던 조선인들에게 실내 음악회는 생경했다. 음악회장 연주를 배경 삼아 춤을 추거나 소리 지르고 담배 피우는 일도 허다했다. 관람 에티켓 지적이 늘자 양악은 점차 대중과 멀어졌다. 그럼에도 현진건의 단편 「피아노」가 그려내듯 ‘피아노만 들여놓으면 신식 가정이 될 것 같은 착각’이 1920~30년대 경성인을 자극했다.
경성시대 음악 사회를 분석한 박사논문이 바탕이 된 책이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생활공간을 가로지르며 음악이 문화정치적으로 담당한 역사를 들여다 봤다. 이 같은 터전에서 한 세기만에 정명훈·임윤찬 등을 낳은 한국사가 새삼 경이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