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쇼생크 탈출’은 일단 보기 시작하면 끝까지 멈출 수 없는 명작으로 유명하다. 명작답게 명대사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바쁘게 사느냐, 서둘러 죽느냐. 19년 동안 억울하게 옥살이하던 주인공 ‘앤디’가 탈옥 전에 동료 죄수 ‘레드’에게 남긴 말이다. 나는 이 대사를 이렇게 이해했다. 살아만 있는 삶은 서둘러 죽기와 다름없다고. 현실을 인정하는 가운데 일상을 지키려는 의지가 삶을 삶답게 만든다고.
살아만 있는 건 ‘서둘러 죽는 것’
암투병 중 활발히 활동하는 지인
현실 인정하고 일상 그대로 유지
죽음까지도 아우르는 행복 추구

요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접속하거나 이름을 들어봤을 공간이 있다. 지난 2022년에 문을 연 온라인 독서 모임 플랫폼 ‘그믐’이다. 책이 잘 팔리지도 않고 책 읽는 사람도 점점 줄어드는 세상에서 ‘그믐’은 단기간에 국내 최대 규모의 온라인 독서 모임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그 흔한 광고와 회원 혜택 하나 없이 이뤄낸 성과여서 출판계의 주목을 받았다. 김새섬 대표는 ‘그믐’을 일궈낸 주역이다.
‘그믐’이 존재감을 드러낸 비결은 요즘 대세인 ‘쇼츠’와 ‘릴스’ 같은 휘발성 강한 압축 콘텐트 대신 느리고 진지한 대화가 오가는 공간을 지향하는 역발상이었다. 심지어 앱도 없이 웹사이트만 운영한다. 책이란 본디 느린 소통 수단이다. 김 대표는 그런 책의 성질을 잘 파악하고 전략을 짰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 이런 ‘그믐’의 행보를 우려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김 대표는 뚝심을 발휘해 책으로 나누는 깊이 있는 소통에 목마른 숨은 독자를 대거 수면 위로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그믐’은 작가, 출판사, 도서관을 독자와 연결하는 독서 생태계로 진화했다.
김 대표는 최근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가 악성 뇌종양인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았다. 교모세포종은 암 가운데 치료가 가장 어려운 편이고, 서울대 암연구소에 따르면 평균 생존 기간이 12~14개월로 악성도가 매우 높다고 한다. 완치 사례도 있지만, 장기 생존율이 낮다는 점도 냉정한 현실이다. 수술을 받고 한동안 사경을 헤맸던 김 대표의 선택은 ‘앤디’처럼 바쁘게 살기였다.
김 대표는 지난 6월 초부터 남편인 장강명 작가와 함께 ‘암과 책의 오디세이’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했다. 김 대표는 장 작가를 인터뷰어로 삼아 암 투병기를 비롯해 책 추천, 음식 이야기 등 다채로운 소재로 콘텐트를 제작해 매일 여러 플랫폼에 올리고 있다. 암 환자가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는 콘텐트는 많았지만, 이렇게 부부가 함께 만드는 콘텐트를 접하긴 처음이어서 신선했다.
나는 김 대표가 장 작가와 함께 자연스럽게 암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농담까지 더하는 태도에 전율했다. 특히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두 사람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오갈 땐 괜히 긴장해 식은땀까지 흘렸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며 삶을 관조하는 두 사람의 태도에서 따뜻함을 넘어 담대함과 숭고함까지 느꼈다. 두 사람의 ‘티키타카’에선 그 어떤 로맨스 영화보다도 사랑이 넘쳤다. 아, 이게 바로 인간다움이구나.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한데 아우르는 행복을 추구해야 비로소 온전히 행복해질 수 있구나.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나이 든다는 건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고, 잘 죽어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아무리 부자여도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건 기억뿐이다. 그 기억이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면 꽤 괜찮은 삶 아닐까. 나는 오래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머니와 아무도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객사한 동생을 통해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삶의 어떤 문제도 해결해줄 수 없음을 뼈저리게 배웠다. 삶과 죽음을 철저히 나누는 사회 분위기가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태도로 이어져 한국을 자살 대국으로 만들고 삶의 질을 떨어트린 게 아닐까.
누구도 우리에게 잘 죽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으니 잘 사는 법을 배우기가 쉽지 않다. 죽음이 일상인 병원조차도 엘리베이터에 4층 버튼을 만들지 않는 나라 아닌가. 일상에서 죽음이 자취를 감춘 한국 사회에서 ‘암과 책의 오디세이’는 잘 사는 법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는 역설이다. 김 대표의 이런 시도가 사회 전반에 잔잔한 파장을 부를 마중물이 돼 주길 희망한다. 더불어 김 대표가 끝내 자유를 찾은 ‘앤디’처럼 암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정진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