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된 악재에 위기 맞은 국내 보리
정부 수매 중단 뒤 가격 안정성 떨어져
2019년 생산량 20만t서 작년 7만t ‘뚝’
농가 감소·잦아진 이상기온 등 영향도
국산 맥아, 외국산 대비 2.5배가량 비싸
국내 맥주 업체 대부분 수입 맥아 사용
전문가 “정부, 전략직불금 도입 등 필요”
“국산 보리와 가루쌀로 맥주를 만들면 뒷맛이 깔끔해서 한식 요리와 정말 잘 어울려요.”
2일 전북 고창군 수제맥주 공장에서 만난 파머스맥주 관계자는 국산 보리로 만든 맥주를 한 컵 가득 따라 보이며 이같이 말했다. 실제로 수입 맥아와 국산 맥아로 만든 맥주를 비교 시음해보니 국산 맥아로 만든 맥주의 경우 더 산뜻하고 청량한 느낌을 줬다. 맥아는 싹 튼 보리를 건조해 뿌리를 제거한 것으로 맥주의 색과 풍미를 좌우하는 핵심 원재료로 쓰인다.

◆청량한 국산 맥아… 수입 맥아보다 2.5배 비싸
그런데도 파머스맥주를 비롯한 대부분의 수제맥주 업체는 수입산 맥아를 사용한다. 국산 맥아 가격이 수입 맥아보다 너무 비싼 탓이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국산 맥아가 보통 kg에 2000∼3000원인 데 비해 수입산은 1300원 수준에 불과하다. 국산이 2.5배가량 비싼 셈이다. 6개의 커다란 발효조에서 매년 15만t의 수제맥주를 생산하는 파머스맥주도 주력 상품 한두 개를 제외하고는 수입 맥아가 들어간다. 주력 상품의 경우 △농업경영체 및 생산자단체 생산물 △주변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주원료로 활용 △시장·도지사 등의 추천 이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한 ‘지역특산주’로 분류돼 높은 세제 혜택을 받아 그나마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지만, 외부 업체의 주문 상품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 저렴한 수입 맥아를 선택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대부분의 맥주 제조 대기업은 수입 맥아를 사용한다. 이에 따라 국내 맥아 수요의 90% 이상인 23만t가량이 전부 수입품이다.
정부는 국산 맥아 생산량을 늘리고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2017년 최대 250t 규모 맥아 제조 시설인 ‘군산맥아’를 만들었고 이를 증설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아울러 용도에 따른 다양한 보리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 맥주보리가 맥주를 제조하는 데 적합하려면 단백질 함량이 낮고 낱알 한 개의 무게가 40㎎으로 일반 보리보다 무거워야 효소 생성량을 높일 수 있어 특수 품종이 필요해서다.
바람 등 외부 영향에 잘 쓰러지지 않고 보리 위축병에 강하며 발아율이 높아 맥아를 만들기 적합한 ‘새호품’, ‘도안’, ‘강맥’, ‘호단’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외에도 갈변현상이 적어 식혜나 엿기름을 만들기 용이한 ‘혜맑은’, 전분 함량이 많아 요리하기 좋은 ‘아리들’ 등 신품종만 수십 가지에 달한다.
◆보리 가격 안정성 떨어지며 생산량도 감소세

이러한 노력에도 국산 보리의 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2년 정부의 보리 수매가 전면 중단되며 보리 가격 안정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2012년 이전에는 농협이 일반 농가로부터 매입한 보리를 정부가 인수하는 형태로 일정 수준의 수입이 보장돼 보리농사를 짓는 농가가 많았지만 소비부진에 따른 빈번한 과잉 누적 등의 이유로 보리 매입을 중단한 뒤 상당수의 농가가 밀 등 다른 동계 작물을 선택하고 있다.
정부의 보리 수매가 이뤄지던 때인 2011년 보리 40㎏의 가격은 3만760원이었으나 10년 뒤인 2021년 3만3000원, 2022년에는 2만8000원, 지난해에는 3만6000원으로 낮은 가격대에서 큰 변동폭을 보이고 있다. 그간 오른 인건비, 장비 이용료 등 각종 부대비용을 고려할 경우 사실상 농가가 손에 쥘 돈은 미미한 수준이다. 농촌 고령화에 따른 농가 감소와 최근 들어 잦아진 이상기온 현상 등도 보리 생산량 감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리 유통사 관계자는 “보리는 동계 작물로 하계에 쌀농사를 짓고 부수입을 얻기 위해서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그런데 종자값, 기계 이용료, 인건비 등 각종 제반 비용을 따졌을 경우 40㎏에 4만원 이상은 받아야 농민들이 손해를 안 보는데 그 이하로 떨어지니 보리농사를 아예 안 지어버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최근 들어 국내 보리 생산량은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20만t에 달하던 보리 생산량이 이듬해인 2020년(14만3669t) 15만t 이하로 떨어진 뒤 지속적으로 하락을 거듭해 2022년(9만8836t) 10만t 이하를 기록하고 지난해에는 7만891t까지 쪼그라들었다. 과거 쌀 대신 서민들의 밥그릇을 채워줄 만큼 흔했던 보리를 자칫하면 우리 식탁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식량 안보 핵심 보리 포기 안 돼… 마케팅 필요”
보리 생산량 감소는 식량 안보 문제와도 직결된다. 보리는 쌀, 밀 등과 더불어 주요 식용 곡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100%에 가깝던 보리의 자급률은 2023년 기준 25.4%로 대폭 떨어진 상태다. 정부는 2029년까지 보리 자급률을 34.6%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자급률은 오히려 계속 떨어지는 추세다.
최근 전쟁, 보호무역주의 회귀 움직임 등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불안해지며 ‘식량 무기화’의 시대가 도래하는 분위기 속에서 국가의 식량 자급력은 당위를 넘어 ‘안보’의 문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당장의 수익성만을 따져 국내 필수 곡물 수요를 수입에 과도하게 의존하다가는 외교적 마찰 등 비상 상황 발생 시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용원 고려대 교수(생명공학)는 “보리는 쌀, 밀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식량 안보에 핵심이 되는 곡물로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 교수는 “국산 보리 사용을 기업이 꺼리는 이유는 비싼 가격과 공급 불안전성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며 “정부가 농가와 기업의 중간에 서서 농가에는 전략직불금을 포함한 다양한 정책을 통해 소득을 보전해주는 한편 기업에는 안정적인 보리 공급을 보증하면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서 교수는 또 “신선함과 높은 안전성이라는 국산 보리의 장점을 부각하는 방향의 마케팅과 보리 사용처 개발 등도 함께 이뤄져야 값싼 수입 보리와 경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창=채명준 기자 MIJustic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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