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 커지는 북극항로, 한국이 거점 되려면

올여름 폭염은 역대급이다. 지구가 온실가스에 갇혀 달궈지고 있는 느낌이다.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는 북반구의 폭염은 북극의 빙하를 녹이고 있다.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는 지난 5월 사상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일부 지역은 평년보다 10도 이상 높아졌다. 그린란드 원주민들은 해빙기가 한 달 이상 앞당겨져 썰매를 몰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 역설적으로 바닷길이 열린다. 세계는 북극 해빙(解氷)으로 인한 기후 변화를 걱정하는데도, 미국·러시아·중국 등 강대국들은 이 동토(凍土)가 가져올 천문학적인 이익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북극항로는 지구 온난화로 그 이용 시기가 앞당겨지고 있다. 특히 한국 등 극동에서 출발해 베링해협-러시아 북쪽 북극해-유럽으로 가는 북동항로는 머지않아 상업적 운항이 활발해질 전망이다. 아야코 아베-오우치 일본 도쿄대 교수는 지난달 25일 부산에서 열린 국제 기후 극지학술대회에서 “러시아 측 항로(북동항로)는 캐나다 측 항로(북서항로)보다 해빙(海氷) 두께가 얇아 항행 가능성이 더 높다”고 예측했다.
이미 북극항로 물동량은 급증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도 불구하고 2022년 3404만t에서 지난해 두 배 정도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는 2035년엔 2억 7000만t으로 물동량이 폭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북극항로 투자하는 러시아

흑해 외에 대양으로 진출하는 길이 마땅치 않은 러시아는 북극해를 ‘해양강국’으로 발돋움하는 통로로 보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앞으로 6년간 조선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63억 달러의 연방예산을 투입하기로 했다. 조선 분야에 대한 정부 지원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2036년까지 1600척 이상의 유조선·가스운반선·컨테이너선·벌크선을 건조할 계획이다. 러시아는 또 최신 핵 추진 쇄빙선 ‘야쿠티아’를 북극항로에 투입했다. 2030년까지 10대의 원자력 쇄빙선을 운영, 냉전 이후 최대의 쇄빙선 함대를 갖추게 된다.
에너지 EU 수출 길 막힌 러시아
극동-유럽 연결 북동항로 주목
중 선점 땐 한국은 변방 되는데
광양·포항 지자체들 내부 경쟁
부울경에 신공항 등 국력 집중
미·러·중·일 조정 외교 필요해
미국의 제재로 가동이 중단됐던 러시아 북극 지역 액화천연가스 프로젝트 ‘아틱 LNG2’도 지난달부터 가동이 재개됐다. 러시아 에너지 재벌 노바텍이 6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연간 1980만t의 LNG를 생산할 수 있다.

러시아 경제에서 북극 지역이 기여하는 비중은 계속 커지고 있다. 지난해 전체 수출의 11%, GDP의 7.5%를 차지했다. 러시아 정부는 향후 10년간 북극항로의 자원 개발로 총 1600억 달러의 세금이 걷힐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꺼리고 있다. EU는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 수입을 위해 매달 15억 유로(약 2조2000억원)를 쓰고 있는데, 러-우 전쟁 이후 에너지 안보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전쟁이 끝나더라도 예전처럼 서유럽에 에너지를 팔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러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계 최대 제조업 기지로 에너지 수요가 많은 중국·한국·일본으로 동진(東進)하는 것이다.
중국은 북극해를 아시아-러시아-유럽을 잇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의 주요 통로로 간주하고 있다. 러-우 전쟁 후 러시아와 강력한 유대를 통해 북극항로의 거점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중국은 2004년 북극 니알슨 과학기지촌에 황허기지를 건설, 북극권 국가들과 연구협력을 시작했다. 북극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해 아이슬란드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스웨덴과는 북극 위성수신소 건설에 합의했다. 2018년엔 ‘북극전략 백서’를 채택해 북극 개발을 주도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지자체끼리 경쟁하면 중국 못 이겨
“앞으로 부산에서 컨테이너를 싣고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날이 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당선 후 북극항로 구상을 발표했다. 그는 부산 도심을 차지하는 북항 컨테이너 기지를 신항으로 이전하는 결단을 내렸다. ‘남부권 신공항(가덕도 신공항)’ 건설로 항만·공항·철도를 연결한 ‘트라이 포트’ 계획도 구상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이후 북극 정책은 정권에 따라 왔다 갔다 했다. 윤석열 정부는 얼마 되지 않은 북극 연구 예산마저 70% 삭감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북극항로 개척을 내걸었다. 부산을 북극항로의 기점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올해 안에 해양수산부를 이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해수부 이전에 대해 충청권과 대구·경북 정치인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또 전남 여수·광양과 경북 포항 등은 서로 북극항로 거점의 최적지라며 나서고 있다. 뭉쳐도 될까 말까 한데 벌써부터 ‘김칫국’을 마시며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경북도는 포항 영일만항을 북극항로 관문항으로 육성하는 전략을 발표했다. 지난해 11월 경북도와 포항시 주최로 열린 ‘북극항로 거점항만 포럼’에서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대구경북신공항 건설로 대한민국의 하늘과 바닷길을 개척해 북극해 개발의 중심지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전남도와 여수·광양시도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여수·광양항 북극항로 거점항만 세미나’를 열었다. 정인화 광양시장은 국정기획위원회를 방문해 광양항 확장을 위한 6개 국비사업을 국정과제로 반영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하지만 국내에 부산을 능가하는 최적지가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부산항은 물동량 처리능력으로 세계 7위 항구다. 국내 컨테이너 물량의 75%를 처리하고 있다.

부산·울산·경남(부울경)은 한국 최대의 제조업 기지다. 울산의 자동차·조선·석유화학, 창원의 기계·방산·원전·중공업, 사천의 항공산업 등 제조업 생태계가 발달해있다. 부울경은 인적 자원도 풍부하다. 합치면 인구 800만 명으로 한국 제조업 엔지니어·기술자의 30%가 몰려있다. 부산은 항만·공항·철도(KTX)를 갖춘 ‘트라이 포트’로 예전부터 한국의 관문 역할을 해왔다.
인근 광양·여수·포항은 각자 특성에 맞게 역할을 분담할 수는 있어도 북극항로의 거점 역할을 하기엔 많이 부족하다.
만약 포항 영일항을 북극항로의 거점항으로 개발한다고 대구경북신공항을 신설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될까. 국내 도시끼리 ‘도토리 키재기’를 할 게 아니라 중국 등 경쟁국을 어떻게 제치고 거점을 확보할지에 집중해야 한다.
중국 항구는 세계 컨테이너 처리물량 순위 10위안에 싱가포르항·부산항·로테르담항을 빼고 7개를 올려놓고 있다.
상하이항·닝보-저우산항·선전항·칭다오항·광저우항은 부산항보다 크고 모두 서해를 향하고 있다. 배후에 막강한 제조업 기반을 갖추고 있다. 한국이 국력을 집중해 부울경을 북극항로 거점 항로로 밀어도 될까 말까 한 상황이다.
정권 떠나 장기적 국가 전략 필요
부산을 북극항로로 개발하기 위해선 24시간 운영이 가능한 화물 공항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가덕도 신공항은 공사비와 건설기간이 늘어나면서 현대건설이 사업에서 손을 빼는 등 좌초위기를 맞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가덕도 공항사업이 좌초되거나 지연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가덕도 신공항을 북극항로의 관문공항으로 개발하려면 완공 시기에 급급하지 말고 개발 계획 자체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 당초 예측보다 공사비가 급증하고 지반 침하로 애물단지가 된 일본 간사이 공항의 전철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
북극항로가 열린다고 한국에 기회가 돌아온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만약 북극항로의 거점이 상하이 등 중국으로 넘어간다면 한국은 세계의 물동량이 그냥 통과하는 변방으로 전락할 것이다. 반면 큰 그림을 그려 북극항로의 거점이 된다면 동북아의 핵심국가로 떠오를 수 있다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는 2021년 펴낸 저서 『한국의 시간』에서 “한국이 북극항로를 주도하면 변방국가에서 벗어나 패권을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한국이 거점이 되려면 동북아 4강(미·중·러·일)의 팽팽한 힘을 조정하는 천하사각지계(天下四脚之計)를 구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극항로가 지역의 표심을 얻으려는 정치인들의 구호로 남발돼선 안 된다. 정부가 외교적 노력, 규제 완화, 재정 지원, 지역 협력 등을 주도하고 여·야 정치권과 모든 지자체가 협력해야 실낱같은 희망을 기대할 수 있다. 한국에 주어진 시간은 별로 없다. 우리가 이러는 사이 북극의 빙하처럼 기회는 점점 녹아 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