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에 핀 연보라색 꽃이 5월의 산하를 물들이고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이 있고, 줄기가 곧아 선비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의 어느 선비는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그 곡조를 간직한다”고 노래했다.
오동나무를 볼 때마다 아주 오래전 고향 마을 풍경이 떠오른다. 마을 사람들은 고단한 하루의 노동을 마감하고 간략한 저녁 식사를 마치면 서둘러 우리 집에 오곤 했다. 트랜지스터라디오가 있던 우리 집은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었다. 라디오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하려고 마당가 오동나무 가지 위에 올려놓았다. 시시껄렁한 농담이 오가다가도 연속극이 시작되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숨을 죽인 채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함께 감탄하고 웃고 눈시울을 적셨다. 연속극이 끝나면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고 그들이 비운 자리를 마치 우유를 쏟아놓은 것 같은 은하수가 채웠다. 공동체가 살아 있던 시절의 풍경이다. 결혼, 출산, 장례와 노동의 모든 과정이 마을의 일이었던 그 시절은 가난했지만 비참하지는 않았다.
근대화 물결이 밀려오고 속도와 효율이 중요시되면서 공동체적 가치는 점차 무너졌다. 전기가 들어오고 농사에 기계가 도입되면서 품앗이나 울력은 사라졌다. 집마다 라디오가 생기자 동네 사랑방은 해체됐다. 마을 사람들의 관계와 감정의 밀도가 옅어졌고, 그 빈자리를 이해관계가 채웠다. 마을은 점점 쓸쓸해졌다.
도시는 더욱더 그러했다. 사람들 접촉이 빈번한 도시에서도 외로움은 상수가 됐다.
조각가 자코메티는 불안과 고독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부서질 듯 연약한 형체의 사람들이 각자의 길을 걸을 뿐 서로를 향해 가지 않는다. 외로움은 고독과 달리 우리 마음에 그늘을 남긴다. 그 그늘에 깃드는 것이 타자에 대한 적대감이다. 타자는 보살피고 보듬어 안고 환대해야 할 이웃이 아니라 경계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외로움은 더욱 심화한다.
얼마 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랭커스터 카운티에 있는 아미시 마을에 다녀왔다. 18세기 초 유럽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주해온 사람들의 후예들이 사는 그 마을에선 마차가 심심치 않게 보였다. 6마리의 말이 끄는 쟁기로 땅을 경작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배터리 이외에는 전기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물론 필요할 때 자동차나 기계를 빌려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기술을 배척하지는 않지만 기술과 맺는 관계는 우리와 사뭇 다르다. 그들은 기술이 공동체를 해치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기술과 관계를 맺는다. 기술은 자칫하면 원심력으로 작동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그들은 편리함보다는 관계의 친밀함을 선호한다.
영어로 공동체를 뜻하는 커뮤니티는 라틴어로 ‘함께’라는 뜻의 ‘com’과 ‘의무·부담·선물’이라는 뜻의 ‘munus’가 결합한 말이다. 공동체란 서로 부담과 선물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타자에 대한 책임감이 공동체를 하나로 연결하는 끈이라는 말이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은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전체의 일부다”라고 노래했다.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는 이 구절을 조금 변형해 “어떤 남자나 여자도 섬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반도와 같아서 절반은 대륙에 붙어 있고 절반은 바다를 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은 개별적 단자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관계와 소속감을 통해 연결된 존재라는 뜻일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하고, 다른 이들의 존재를 긍정할 때이다.
대선이 다가오며 날 선 말들이 세간을 떠돈다. 상대에 상처를 주려는 말, 끌어내리려는 말, 갈등과 분열을 획책하는 말이 횡행한다. 정치 공간에서 품위 있는 말을 기대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일까? 오동나무꽃이 핀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울림이 좋은 따뜻한 곡조를 가슴에 품은 사람과 만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