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인데 뭐 먹지?>
삼복 중 마지막 날 ‘말복’
복날 대표 보양식의 역사
‘이열치열’부터 ‘힙’한 보신까지

서울 용산구에서 근무하는 직장인 A씨는 역대 최고 폭염을 기록한 올여름 여느 때보다 기력이 떨어졌다. 그는 그동안 ‘복날에는 몸보신을 해야 한다’는 인식을 구시대적 유물로 여겼지만, 올해는 뜨거운 보양식을 직접 찾아 먹고 있다.
A씨는 “예전에는 건강기능식품만 챙겨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복날에 삼계탕이나 장어탕, 추어탕처럼 뜨거운 보양식을 먹어야 제대로 몸보신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9일은 1년 중 더위가 가장 심한 시기인 세 절기 ‘삼복(三伏)’ 가운데 마지막 날인 ‘말복(末伏)’이다. ‘복날’의 ‘복(伏)’자는 ‘사람(人)’이 ‘개(犬)’처럼 엎드린 모양으로, 더위에 지쳐 몸을 웅크린 모습을 뜻한다. 한국세시풍속사전에 따르면, 가을철 금(金)의 기운이 여름의 불(火) 기운에 눌려 엎드린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복날엔 삼계탕·보신탕”…언제부터 먹었을까?
복날 대표 음식은 단연 삼계탕이다. 닭고기에 인삼, 대추, 마늘, 찹쌀 등을 넣어 푹 끓인 이 보양식은 여름철 상징이지만, 의외로 역사가 길지는 않다. 1950년대 후반 닭국에 건조 인삼가루를 넣은 ‘계삼탕’에서 시작해 1960년대 대중식당을 중심으로 지금의 형태로 퍼진 근대 음식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때 복날의 주인공은 보신탕이었다. 조선 시대의 세시풍속을 정리한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개장국(보신탕)은 옛 제사에서 유래했으며, 개가 금(金)에 속한다는 오행 사상에 따라 복날 부족해진 금의 기운을 보충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개를 먹는 문화에 대한 인식 변화와 함께 지난해 ‘개 식용 금지법’ 통과로 보신탕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 밖에도 추어탕이나 장어탕, 염소탕, 오리백숙 등 주로 뜨거운 국물 요리가 여름 보양식으로 사랑받아 왔다.
더운데 뜨거운 음식 먹고 시원하다고 하는 이유
무더운 날씨에 굳이 뜨거운 음식을 찾는 이유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는 동양 의학적 영향이 크다. 더운 여름 체온 유지를 위해 혈액이 피부로 몰리면 상대적으로 소화기관은 차가워지고 기능이 떨어지기 쉽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속이 차다’고 진단하는데, 뜨거운 음식을 먹어 땀을 내면 체온 조절과 몸속의 온기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봤다.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에도 우리나라의 ‘이열치열’과 비슷한 여름 보양 문화가 있다. 중국에는 한여름 가장 더운 시기인 ‘삼복천(三伏天)’ 때 양고기탕, 약선탕, 매운 훠궈 같은 뜨거운 요리를 먹으며 땀을 내는 전통이 있다.
일본 역시 여름철 기력 보충을 위해 장어 덮밥을 먹는 ‘도요노우시노히(土用の丑の日)’ 풍습이 있으며, 미소시루나 나베 같은 뜨거운 요리를 일부러 즐기기도 한다.
반면, 서양에는 이열치열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여름 음식도 주로 시원한 요리가 중심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장어젤리’는 삶은 장어를 차갑게 굳힌 음식이다. 스페인의 ‘가스파초’는 토마토와 오이, 양파, 마늘 등을 갈아 만든 냉수프다.

MZ들은 ‘야키토리’·‘북경오리’부터 ‘채식’ 보신
최근에는 한국의 보양식 문화도 다변화하고 있다. ‘잘파세대(Z세대+알파세대)’를 중심으로 ‘뜨거운’ 복달임 음식보다 일본식 닭꼬치 요리인 ‘야키토리’나 중국 고급요리 ‘북경오리(베이징덕)’ 등이 색다른 복날 음식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복날 식탁에 ‘채식’이라는 새로운 흐름도 등장했다. 복날 시즌에 닭고기 도축량이 급증하는 것을 꺼리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전통적인 육류 중심의 보양식 대신 콩국수, 채개장, 버섯전골 등 식물성 재료를 활용한 대체 보양식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지난해부터 복날에 맞춰 채식을 하고 있다는 김모(25)씨는 “복날 몸보신 문화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옛날엔 필수적이었지만, 요즘처럼 많이 먹어서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시대에는 굳이 몸보신이나 과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며 “복날에 샐러드를 먹으면 속이 가벼워져 더 건강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국윤진 기자 soup@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