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잘 주무십니까?

2025-05-22

요즘 진료실에서 가장 자주 듣는 하소연은 “먹고 살기 너무 힘들다”는 말이다. 불안한 경제 상황과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삶이 고단해지면서 스트레스와 불안,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이런 시기엔 환자들의 혈압이나 혈당 같은 수치가 전반적으로 나빠지는 경향이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이럴 때 주치의가 꼭 던져야 하는 질문 중 하나는 “요즘 잘 주무세요?”다. 이면에 수면 문제가 자리 잡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생의 3분의 1은 수면이 차지

잠은 휴식인 동시에 재정비 과정

부족하면 청소년 키 성장 방해도

누구나 인생의 3분의 1가량을 잠자는 데 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인의 평균 기대 수명은 83.5세다. 그 해 태어난 사람은 평생 28년을 잠으로 보내고, 실제로 깨어 활동하는 시간은 56년이 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사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잠에 쓴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아깝고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진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좀 더 생산적인 일에 쓸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면 안 된다. 수면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결코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생산 활동’이기 때문이다.

잠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뇌의 노폐물을 씻어내고 기억을 정리하며 감정을 다듬는 정교한 재정비 과정이다. 깊은 수면 중에는 뇌 속 청소 도구인 ‘글림프 시스템’이 활성화되어 베타아밀로이드 같은 치매 독성 노폐물을 씻어낸다. 또한 해마는 중요하지 않은 기억을 지우고 의미 있는 정보를 저장한다. 수면은 이처럼 기억을 선별하고 정리하며, 정서적 균형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잠자는 시간이 줄면 집중력과 창의력·면역력은 물론 인지기능까지 떨어질 수 있다. 수면은 몸이 쉬는 시간이 아니라 뇌가 생산적으로 일하는 시간이다.

수면은 다양한 건강 지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잠이 부족하거나 질이 나쁘면 고혈압·고지혈증·당뇨병 같은 만성 질환이 악화한다. 평소 안정적이던 검사 수치가 갑자기 나빠졌다면 수면 패턴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수면 부족은 식욕 조절 호르몬의 균형을 무너뜨려 비만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들을 예방하고 개선하려면 하루 7~9시간의 질 좋은 수면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청소년의 수면은 성장과 발달을 위해 특히 중요하다. 수면 부족은 학습 저하, 감정 조절의 어려움, 스트레스 증가, 만성 피로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성장호르몬은 깊은 수면 중에 분비되기 때문에 수면 부족은 키 성장을 방해한다. 청소년에게는 하루 8~10시간의 수면이 권장되지만, 국내 청소년의 실제 수면 시간은 이보다 훨씬 짧고 매년 줄고 있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수면을 방해하는 요소는 우리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밤은 지나치게 밝아졌고, 스마트폰과 컴퓨터 사용이 늘면서 블루라이트 노출 시간도 길어졌다. 그 결과 생체 시계가 흐트러지고, 수면 유도 호르몬인 멜라토닌 분비가 억제되어 몸과 뇌가 쉴 틈을 갖지 못한다.

삶이 팍팍해지며 스트레스도 늘었다. 스트레스는 교감신경을 자극해 밤에도 각성 상태를 유지하게 하고,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를 증가시켜 멜라토닌의 작용을 방해한다. 그 결과 잠들기 어렵고, 자주 깨는 일이 반복된다.

술과 카페인도 대표적인 수면 방해 요인이다. 잠자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렇게 마시는 술은 오히려 깊은 잠을 방해하고 새벽에 자주 깨게 한다. 카페인 역시 문제다. 늦은 저녁 커피나 에너지 음료를 마시면 잠들기 어렵고 수면 시간이 줄며, 깊은 잠을 못 자 피로가 누적된다.

수면 부족이 문제로 드러나면 많은 이들이 수면제부터 찾는다. 수면제는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할 수 있으나 정상적인 수면 리듬을 방해해 오히려 수면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장기 복용 시 내성이 생기고 수면제 없이는 잠들기 어려운 심리적·신체적 의존이 생길 수 있다. 특히 고령층에선 인지 기능 저하와 균형 감각 상실, 낙상 위험 등 부작용이 더 커 주의가 필요하다. 실제로 수면제 복용 노인은 낙상 및 고관절 골절 위험이 1.5~2배 높다는 연구도 있다. 수면제 복용 후 밤중에 화장실을 가다 넘어져 크게 다친 사례도 적지 않다.

수면은 뇌와 몸의 회복을 돕는 중요한 생리 과정이다. 그 중요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 요즘처럼 삶이 힘든 시기에는 수면 장애가 늘 수밖에 없다. 수면제는 되도록 피하되 꼭 필요할 때 최소 용량으로 단기간만 사용하길 권한다. 그보다는 수면을 방해하는 환경을 개선하고 생활 습관을 바로잡는 노력이 먼저다.

오상우 동국대 일산병원·가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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