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년 만에 ‘정당방위’ 인정…“잊을 수 없는 해”

2025-12-30

“잊을 수 없는 해이지요. 사건으로부터 61년이란 세월이 흘러 만감이 교차합니다.”

최말자씨(78)는 지난 29일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2025년을 이같이 돌아봤다. 거의 일평생에 걸친 그의 투쟁은 올해 승리로 마무리됐다. 그 승리를 떠올리는 목소리에서는 고통의 세월만큼 짙은 회한이 묻어나왔다.

최씨는 1964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노모씨(당시 21세)의 혀를 깨물어 절단한 혐의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정당방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창창한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다’는 비난이 덧씌워졌다. 노씨는 강간미수를 제외한 나머지 혐의만 인정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성폭행범 혀 절단하고 징역살이

미투 계기로 2020년 재심 청구

“피해자들, 밖으로 나와 도움받길”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듯한 기소·판결, 6개월 넘게 이어진 구속 수사, 불명예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은 56년이 지나도 가시지 않았다. 최씨는 ‘미투(나도 고발한다)’ 운동을 계기로 2020년 재심을 청구했다. 명예회복 과정은 험난했다. 법원의 기각, 재항고와 항고 인용을 거쳐 지난 9월 부산지법이 “피고인의 행위는 자신의 신체와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부당한 침해에서 벗어나려고 한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를 재심으로 인정한 첫 사례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최씨의 투쟁은 용기의 상징이 됐고, 플랫은 그를 ‘2025년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했다.

최씨는 “명예회복은 됐지만 좀 허무하기도 하고 많은 생각이 든다. ‘무죄’ 두 글자를 위해 앞만 보고 살았으니 우여곡절도 많았고 돌아보면 내 삶이 없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그는 18세 나이로 수사와 재판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최씨는 “구둣발을 의자에 올리고는 ‘네 년이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오죽하면 변호사가 ‘결혼해라, 합의해라’ 할 만큼, 그런 시대에 살았다. 딸을 평생 감옥에 살게 할 순 없으니 아버지가 논을 팔아 합의했다”고 전했다. 그는 “그 수모를 어떻게 잊겠나. 지금도 생각하면 자다가도 머리가 쭈뼛해서 잘 수가 없다. 그런 억울함은 몇달 만에 잊을 수가 없다”며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다 풀고 살아야겠다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고 밝혔다.

최씨는 자신과 연대해 준 이들 덕분에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61년 전 “최양은 무죄다”라고 외쳤던 여성들, 성폭력의 구조와 인권을 강의했던 선생님, 수많은 시민, 법적 싸움을 도와준 변호사들과 여성단체 등이 그에게 용기를 줬다. 최씨는 “구속 상태로 법정에 가면 40~50대 엄마들이 몰려와서 ‘왜 죄 없는 최양을 구속했냐’며 아우성을 쳐서 재판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눈물이 났다”고 떠올렸다. 그는 “방송통신대를 다니며 인권과 소수자에 관한 강의를 수십 번 돌려봤다. 그러면서 내가 확실히 피해자라는 걸 알게 됐고 ‘밖으로 나가야 할 때가 왔다’고 용기를 가졌다”고 말했다.

지난 7월23일 검사는 그에게 무죄를 구형했다. 피해·가해 구도가 바로잡히고 최씨의 정당방위가 인정받을 길이 열렸다. 최씨의 용기가 자기 자신을,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꾼 순간이다. 무죄 구형 후 그는 “61년간 국가가 만든 죄인으로 살아온 삶, 이제 꿈이 있다면 후손들은 성폭력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달라고 두 손 모아 빌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최씨는 “피해자들을 보면 항상 마음이 아프다”며 연대를 표했다. 최씨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 이들에게 “혼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꼭 밖으로 나와 도움을 받으라”고 조언했다. 그는 “피해자는 다 마찬가지다. 혼자서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고 고통스럽나. 특히 여성으로서 성범죄 피해는 말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도움을 꼭 받아야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61년이나 지연된 정의를 회복하기엔 어떤 방법도 충분치 않다. 무죄 판결을 계기로 최씨는 형사보상금을 청구했다. 그는 “최근 약 7000만원으로 확정됐다고 변호인에게 전해 들었다”며 “그 죄 없는 어린 것을 192일 구속한 것에 대한 보상이 되진 않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사상 손해배상은 별도로 진행되고 있다. 최씨는 부산 돌려차기·강간살인미수 사건을 예로 들며 “우리 사회의 성폭력 피해자를 보면 항상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나야 나이가 80 가까이 됐으니 두려운 것도 없지만 앞으로 피해자 보호 방안이 보강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씨는 “도와준 분들과 (응원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이 있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 줘서 참 고맙다”며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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