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정몽구 재단 ‘그린 소사이어티’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술 국가다.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2023년 기준 약 119조원으로 세계 5위 수준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비중은 세계 2위(4.96%)다. 미국(3.4%)·일본(3.4%)·독일(3.1%)보다 높다. 연구 인력과 논문·특허 생산량도 세계 상위권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술이 실제 산업 현장에 도달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OECD는 ‘한국 혁신정책 리뷰’를 통해 “한국의 연구개발 능력은 매우 강력하지만, 혁신 기술이 산업적으로 확산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실 기술의 사업화 경로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진단이다.
현대차 정몽구 재단은 지난 2023년 11월 기후기술 연구자들의 사업화를 지원하는 ‘그린 소사이어티(Green Society)’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기업가형 연구자를 육성한다는 취지로 컨설팅·실증·투자유치·사업화 전 과정을 지원한다. 연구비를 지원하는 기존 사업과 달리 ‘기술 사업화 플랫폼’을 구축해 기후테크 생태계를 활성화하고 문제 해결 시기를 앞당긴다는 게 목표다.
재단은 2029년까지 총 180억원을 투입해 18개 연구 과제를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3년마다 9팀을 선발해 기술 고도화, 기술 사업화, 투자 유치 등 매년 단기 목표를 설정하고 연속 지원한다. 기술 개발 이후 연구자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과정을 하나의 트랙으로 엮은 것이 특징이다. 최재호 현대차 정몽구 재단 사무총장은 “한국의 R&D 생태계에서 기초·응용 연구는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가 담당하고 상용화는 기업과 벤처캐피털이 맡으면서 분절돼 있다”며 “민·관·학 관계자들을 연결해 실험실의 연구 결과가 산업 현장에 적용되도록 경로를 개척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기업가형 연구자를 육성한다
재단은 그린 소사이어티에 선발된 9팀을 기후·생태·자원 등 크게 3개 부문으로 구분해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기후 부문에는 ▶에코하이드로팀(유성종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휴젝트(성태현 CTO) ▶한국그리드포밍(강지성 대표) ▶선시프트(박철호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등 네 곳이 선정됐다. 생태 부문은 ▶코드오브네이처(박재홍 대표) ▶이쓰리(이우균 고려대 교수) ▶블루카본(황동수 포스텍 교수), 자원 부문에서는 ▶GFT(정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에코리튬(정다운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수석연구원) 등이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올해로 2년째. 사업착수 시점과 비교하면 성과는 뚜렷하다. 선발팀의 논문 게재 건수는 올해 9월 기준 25건으로 2년 만에 2배 넘게 증가했고, 특허등록 건수도 48건으로 같은 기간 45% 늘었다. 상용화로 가기 위한 기술수요처와 시제품 제작 협의도 29건 이뤄졌다.
팀 구성도 자연스럽게 확대됐다. 기존 총 48명의 연구원으로 시작된 인원은 93명으로 대폭 늘었다. 연구과제를 시작한 이후 신규 고용한 인원도 42명이나 된다. 연구 성과를 넘어 기후테크 기업이 시장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그린 소사이어티에 참여하고 있는 정다운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연구가 잘 풀리면 ‘이 기술이 사회에 쓰이면 좋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긴다”며 “다만 사업화는 늘 막연한 영역으로 남았는데, 그린 소사이어티에 참여하면서 그 과정을 실제 밟아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정 연구원은 친환경 리튬 추출 기술을 개발 중이다. 리튬은 이차전지 생산의 핵심 요소로 전기차 산업의 확장 속도를 결정짓는 변수중 하나다. 기존 리튬 채굴 방식은 광산에서 채굴하거나 대규모 염수를 증발시켜야 했다. 물과 전기 사용량이 많고 생태환경도 훼손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도 상당하다.
그는 흡착 소재를 활용해 염수에서 리튬만 선택적으로 분리하는 DLE(Direct Lithium Extraction) 방식의 리튬 추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정다운 연구원은 “손바닥 크기의 모듈로 시작한 연구가 하루 1.5t의 염수를 처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며 “기술 분야에서 완성이라는 표현을 감히 할 수 없지만 약 60~70% 완성도로 기술을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정다운 연구원은 그린 소사이어티 졸업을 기점으로 2027년 1월 창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후 부문의 또 다른 연구자인 강지성 한국그리드포밍 대표는 전력망 불안정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그리드포밍 태양광 인버터’를 개발하고 있다. 태양광이나 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전력망의 주파수와 전압의 흔들림이 잦다. 기존 인버터는 전력망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형 구조라 이러한 변동을 버티지 못한다.
강 대표가 개발하는 인버터는 스스로 전압과 주파수를 만들어내 전력망을 안정시키는 능동형 장치로, 태양광 발전소 자체가 하나의 ‘전력 안정화 설비’처럼 작동하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그는 “국내에서 아직 제도적 기준이 정비되지 않아 상용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이 본격화하면 시장은 반드시 열릴 것”이라며 “그 시점에 기술이 준비돼 있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기술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에게 실패할 권리를
그린 소사이어티가 특별한 점은 연구자들에게 목표 달성을 조건으로 내걸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른바 ‘조건 없는 투자’다.
한국의 R&D 구조는 대체로 목표 달성을 중심으로 설계된다. 연구비를 받기 위해서는 예상 가능한 목표를 제시해야 하고, 중간평가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다음 해 연구비가 줄기도 한다. 이 때문에 연구자들은 기술의 원래 잠재력보다 달성 가능한 목표를 상정하게 된다. 혁신 기술이 출발부터 제한되는 구조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달 7일 R&D 생태계 혁신 정책을 소개하는 국민보고회 자리에서 같은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은 “연구개발에 참여하는 분들한테 들은 이야기 중에 제일 황당한 것이 대한민국은 연구개발 성공률이 90%가 넘는다는 점”이라며 “연구개발이란, 특히 공공 부분의 연구개발 투자는 정말로 어려운 과제들을 (해결하고)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린 소사이어티의 초점도 ‘연구자가 어디까지 상상해 볼 수 있는가’에 맞춰져 있다. 연구자들이 시장과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실패해도 그 위험을 떠안아줄 ‘완충 지대’를 만들어 기술 잠재력의 최대치를 끌어낸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재단은 특정 기업의 이해관계에 묶이지 않고, 국가 연구기관·대학·기업·투자자를 연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열린 ‘그린 소사이어티 C-Tech Fair’에서 홍성진 스파크랩 전무는 “기후테크는 빠르게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문제를 풀어야 하는 분야”라며 “초기에 연구자의 문제의식을 믿고 투자하는 민간재단의 자금이 ‘밑거름 자본’ 역할을 한다”말했다. 이날 토크세션에 참여한 정성훈 LS일렉트릭 부장은 “대기업도 리스크가 큰 초기기술에는 쉽게 들어가기 어렵다”며 “이러한 위험 구간을 메워주는 프로그램의 존재 여부가 향후 CVC 협력과 투자의 속도를 결정한다”“고 했다.
국내 첫 기후테크 ‘민·관·학 통합지원’ 모델
그린 소사이어티의 실험은 재단의 지원사업을 넘어 기후테크 생태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제안이기도 하다. 그린 소사이어티 총괄위원장을 맡은 정진택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이사장은 “기후기술 연구성과를 사회적으로 실현해 시스템 체인저 역할을 하는 게 목표”라며 “논문과 특허에서 끝나는 기후테크가 아니라 실험 단계(TRL3)에 있는 기술을 실용화 단계(TRL7)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K-기후테크 혁신 기업가’를 길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재단은 2023년 국가과학기술연구회와 협약을 맺고 국가녹색기술연구원, 고려대 첨단기술비즈니스학과와 함께 국내 최초의 기후테크 민·관·학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정 위원장을 포함해 33명의 기술·투자·비즈니스·정책 전문가들이 연구팀을 2년간 밀착 지원했다.
민·관·학 협력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고려대가 담당한 사업화 컨설팅이다. 컨설팅에는 기업가정신 교육부터 비즈니스모델 정립, 사업성 고도화, 글로벌 진출, 국제기구와의 협력 등 사업화를 위한 모든 과정이 포함됐다. 박재홍 고려대 첨단비즈니스학과 교수는 “연구자는 기술을 만들지만 기술의 운명을 바꾸는 건 연결”이라며 “기후테크가 실험실에서 나와 산업 현장에 구현되는 단계마다 필요한 자원을 연결하고, 궁극적으로 우리 일상을 바꾸는 기술이 되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내년 3차년도에 접어드는 참여팀들은 초기 기술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단계를 넘어 실제 시장에 기술을 적용하는 구체적 설계 단계에 돌입한다. 이 과정에서 해외 기관과의 협력도 본격화된다. 재단은 미국의 에너지정책 싱크탱크 RMI와 파트너십을 통해 국내 기술 검증을 넘어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는지 시험에 나설 계획이다. 재단은 “3차년도는 연구자에게 가장 힘들면서도 값진 단계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무성 현대차 정몽구 재단 이사장은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는 연구자가 기업가적 역량을 갖추고 시장과 사회를 향해 도전하기 시작한 점”이라며 “이 모델이 다른 공익재단에도 새로운 기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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