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페나 행사장에서 한글이 적힌 책자를 펼쳐놓고 있으면 “한국인이에요?”라며 호감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거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한국어를 배우는 중국인들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독학했다고 하는 이들도 실력이 유창해 놀란다.
중국은 2017년 주한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에 대한 비공식 보복 조치로 한국 영화·드라마·대중가요 공연 등을 금지했다. 중국이 주변국과 관계를 개선하기로 외교 정책을 전환하면서 이른바 ‘한한령’ 해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 가수의 중국 내 공연 소식이 종종 들리는 것도 그러한 기대에 부합한다.
하지만 공연이 추진됐다 엎어지는 일이 잦다. 오는 5월 31일 푸저우에서 예정됐던 아이돌 그룹 이펙스의 공연은 ‘한한령 이후 최초의 한국가수 상업공연’으로 주목받자 별다른 설명 없이 취소됐다. 지난해 7월 록밴드 세이수미의 베이징 공연도 취소됐다. 한국 일각에서 분석하는 중국의 자문화 우선주의 때문은 아니다. 중국의 관료주의와 한국의 조급증이 만난 결과다.
해외 대중문화 수입은 중국의 외교 정책뿐만 아니라 내수 활성화 정책과도 연관돼 있다. 중국공연예술협회는 지난해 콘서트 관람객의 60% 이상이 공연지 외의 도시에서 왔으며 이들이 티켓 구매 외 교통, 숙박, 식사에 지출하는 금액이 2000억위안(약38조6000억원)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이러한 ‘공연경제’를 장려하는 분위기에서 친대만 가수로 찍혀 한때 입국이 불허됐던 케이티 페리의 공연이 올 가을 항저우에서 열린다. 자국 내수에 영향을 주는 수입 할리우드 영화의 부진을 두고 ‘중국 정서와 안 맞아서’라고 분석하며 아시아 영화를 더 많이 수입해야 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한국 대중문화 수입도 언젠가 재개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전면 재수입해도 된다는 명확한 신호는 없다고 한다. 중국 지방 도시는 눈치 게임을 한다. 경제도 살려야 하고 한국과 잘 지내자는 흐름이 있으니 ‘이 정도’는 괜찮은 것인가. ‘윗선’이 원하는 속도를 앞지를 가능성이 있다 판단하면 책임을 피하고자 하던 일을 엎는다. 중국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한국 대중문화 수입 재개는 중국도 필요해서 하는 일이다. 단, 앞으로도 정치적 상황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한국은 대중문화인의 법적·경제적 권익 보호 방안부터 준비하고 중국에 관철시킬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한국 대중문화 수입은 수평적 상황에서 결정돼야 한다. 하지만 제목에 ‘한한령 해제’가 포함된 기사가 뜨는 날 엔터주는 급등한다. 이 때문에 한국이 한한령 해제를 읍소하는 모양새가 된다. 한국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한국은 대중문화 재개방을 당당히 요구하며 차갑게 준비해야 한다. ‘한한령 해제’가 중국이 베푸는 선물처럼 와서는 안 된다. ‘한한령’이란 용어 사용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중국 시장이 다시 열린다는 꿈에 부풀기 전 돌아볼 것이 있다. 1990년대 인기를 끌었던 이영도의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가 올해 <용족(龍族)>이라는 제목으로 중국에 번역 출간됐다. 학력사회 문제를 다룬 사회학자 오찬호의 책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제목 그대로 중국에 번역 출간됐다. 중국은 공연경제를 위해 한국 인디가수를 초청하고 있다. 장르음악 팬이 두텁단 의미다.
한국은 중국에 영감이 되고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을 문화를 계속 창조할 수 있을까. 한국 문화는 그만한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나.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국 대중문화가 중국이 한국을 길들이는 지렛대가 되지 않게 만들 수 있다. 한·중관계는 미·중관계의 종속변수인 것이 현실이지만 문화는 지정학을 넘는 힘이 있다. 우리는 그 힘을 제대로 키우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