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윤식이 엠마 스톤으로···‘지구를 지켜라!’의 장엄한 재해석, ‘부고니아’

2025-11-03

대기업 CEO를 ‘외계인’으로 확신하며 납치한다. 머리카락은 다른 외계인과의 ‘교신 수단’이니, 두피가 드러나게 밀어버린다.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가 보여준 독창성은 이 두 문장만으로도 설명이 된다. 어디서 본 적 없는 희한한 설정에 외계인과 인간,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을 음울하게 버무린 작품은 당시 7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2000년대 한국 영화계의 ‘비운의 명작’으로 오래 회자됐다.

이 명작이 할리우드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 5일 개봉하는 <부고니아>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신작이자 <지구를 지켜라!>의 리메이크작이다. <유전>의 아리 애스터 감독이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공동제작을 맡았고, HBO 시리즈 <석세션>의 작가 윌 트레이시가 시나리오를 썼다.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불행을 설명할 길이 없는 청년이 지구를 망치러 온 외계인이 있다고 굳게 믿으며 벌이는 납치극.’ 란티모스 감독은 20여년이 흘렀는데도 낡지 않고 신선한 설정에 오늘날의 시대상을 담아낸다. ‘부고니아’는 그리스어로 죽은 소의 사체에서 벌이 생겨난다고 여긴 고대의 잘못된 믿음을 뜻한다.

납치를 자행하는 주인공, 테디(제시 플레먼스)는 허위정보에 확신을 가지는 음모론자의 모습을 보인다.일반 사람과 똑같이 생긴 ‘외계인’을 구분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건, 원작의 병구(신하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괴한 기계가 달린 헬멧을 쓰고 공상과학적 헛소리를 늘어놓는 병구는 자기만의 세계의 빠진 신뢰하기 어려운 인물로 보인다.

테디는 다르다. 물류센터 노동자이자 양봉가인 그의 언어는 논리정연하고, 겉보기에도 이상하지 않다. 병구의 납치 파트너 순이(황정민)가 사랑하기 때문에 병구를 이해한다면, 테디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촌 동생 돈(에이든 델비스)을 말로 가스라이팅한다.

“아무 것도 잘못되지 않은 어릴 때가 그립지 않니.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니.” 그는 더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외계인을 잡아와야 한다고 논리를 편다. 돈이 주춤할 때면, ‘겁나냐’며 그의 남성성을 자극해 행동하게 한다. 테디는 거듭 ‘세상이 우리에게 잘못했으니, 우리는 이래도(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식의 생각을 합리화하는데, 그 극단적인 사고 방식은 2025년의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이어 영화는 납치를 당하는 CEO의 성별을 반전시킨다. 화학 약품 회사의 남성 사장 강만식(백윤식)은 생명 바이오 기업 여성 CEO 미셸(엠마 스톤)이 된다. <가여운 것들>(2024) 등 란티모스 감독과 다섯 작품째 함께하고 있는 엠마 스톤이 그를 연기하며 삭발 투혼을 벌였다.

미셸은 만식보다 교묘한 인물이다. 만식은 자신의 회사가 유출한 독극물에 병구의 어머니가 식물인간이 됐음에도 병구가 벌인 1인 시위에 눈 하나 깜짝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계급이다. 그 꼭대기의 만식에게 ‘산업재해 따위’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

2025년 <부고니아> 속 CEO는 만식보다는 나아졌다. 미셸은 테디의 어머니가 식물인간이 되자, 테디 앞에서 정중히 사과하고 치료비를 전액 부담할 것을 약속한다. 생체실험을 하면서도 기술력으로 ‘지구를 더 낫게 만들겠다’고 말한다. CEO의 태도가 달라졌음에도 병구와 테디가 결국 같은 선택을 한다는 건, 번지르르한 말이 늘었을 뿐 세상은 그대로 엉망이라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각자의 논리를 탑재한 테디와 미셸을 주인공으로 한 <부고니아>는 철학적인 토론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구를 지켜라!>의 잔혹동화와 같은 순수함이 선사했던 키치함은 사라졌다. 대신 철학적인 대화와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이 장엄하고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5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1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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