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공장 사태를 계기로 한국인에 대한 미국 비자 제도가 전면 개편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호주·싱가포르·칠레 등은 국가별 특별비자가 있지만 한국은 없다. 최다 대미 투자 국가(2023년 215억 달러)에 오를 만큼 한국 기업들의 대미 투자가 늘었는데도 양국 정부가 비자 문제를 방치해 왔다는 비판이 나온다.
현재 미국에서 적법하게 일할 수 있는 전문직 비자(H-1B)나 주재원 비자(L-1)는 발급 요건이 까다롭고 심사에도 수개월이 걸린다. 이 때문에 전문인력이 수시로 필요한 공장 건설이나 초기 생산 단계에서 단기 상용 비자(B-1)나 무비자 전자여행허가(ESTA)를 통한 우회 출장 관행이 생겼다는 것이 경제계 설명이다.
이에 경제계에선 미국에서 한국인 전문인력 취업 비자(E-4)가 신설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한국인 전용 쿼터를 부여해 필요에 따라 신속하게 비자를 발급해 달라는 취지다. 미 의회에서도 이 같은 필요성을 알고 있다. 2013년 113대 의회부터 회기마다 E-4 비자 신설을 담은 ‘한국 동반자 법안(Partner with Korea Act)’이 꾸준히 발의돼 왔다.
올해도 미 공화당 소속 영 김 하원의원이 관련 법을 대표 발의했다. 구체적으로 정보기술·엔지니어링·수학·물리학·의학 등 전문 교육·기술을 보유한 한국 국적자에 대해 연간 최대 1만5000개의 특별비자 쿼터를 주는 내용이다. 하지만 10년 넘는 기간 동안 미 정부와 의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
한국 정부가 그간 한·미 비자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8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출석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수년 동안 우리 비자 관련 문제를 (미국에) 제기해 왔다”면서도 “최근 미국이 외국인 비자를 오히려 더 줄이는,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반면에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인 싱가포르·칠레는 2004년부터 각각 연간 5400명, 1400명의 쿼터(H-1B1)를, 호주는 2005년부터 1만500명의 쿼터(E-3)를 확보했다. 모두 전문 인력 대상이다. 다만 이는 자유무역에 우호적이던 시기에 특별비자 조건을 FTA 조항에 포함했기에 가능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미국 내에서 이민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면서 비자 관련 법안 통과가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
미국과의 비자 관련 협상에서도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현지 반발을 잘 설득해야 한다. 싱가포르·칠레 특별비자의 경우엔 비자 신청 전후 90일 이내에 동일·유사 직종의 미국 근로자를 해고하지 못하고, 해당 직무에 미국인을 우선적으로 모집해야 하는 등 ‘미국인 우선 채용 노력’ 규정을 담고 있다.
장 원장은 “현지인 채용에 노력한단 전제로 기본 설비나 첨단 장비 세팅 등 특정 영역에서 한국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입증하면서 특별비자 신속 발급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며 “조지아, 앨라배마 등 한국 기업이 진출한 지역 의원들이 체감할 수 있는 현지 고용·세수 기여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필요도 있다”고 밝혔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도 “장기적으로 미국 인력을 쓰더라도 과도기엔 한국 인력이 불가피하게 필요하다는 점을 강하게 어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