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작곡하는 ‘미·중 데탕트’ 변주곡

2025-08-06

1950년 10월, 중국이 압록강을 넘어 개입하면서 한국전쟁의 양상이 일거에 뒤집혔다. 이듬달, 미국은 중국 자산을 동결하고 무역을 전면 중지하는 경제봉쇄를 단행했다. 당시 세계 GDP의 30%를 차지하던 미국의 제재로 중국은 자급자족 경제로 내몰렸고, 자연히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히 심화됐다. 1970년대가 되자 미국의 경제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중국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바뀌었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빠르게 증가하는 무역적자를 개선하기 위해 수입품에 10%의 관세를 부과했다. 같은 해 8월 15일, 달러의 금 태환을 중단해 수십 년간 국제금융 질서를 지탱했던 브레턴우즈 체제를 끝냈다. 닉슨의 정책 선회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중국 금수조치를 해제하고 무역을 재개했다. 1972년에는 중국을 방문해 관계 개선의 기틀을 다졌다.

닉슨의 대중 접근은 1969년 우수리강에서 벌어진 중·소 국경분쟁의 틈을 파고든 전략이었다. 중·소 갈등은 핵전쟁 가능성을 거론할 만큼 악화됐고, 미국은 이를 활용해 중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소련의 패권 도전을 견제했다.

소련은 중·소 동맹이 파탄 나고 국방비 부담이 급증해 경제 활력을 상실했다.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은 덩샤오핑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1984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은 소련의 고립을 심화시켰다.

미국은 소련산 원유 구매 중단과 수출 통제로 경제적 압박을 강화했다. 그 여파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 공산권은 연쇄적으로 붕괴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오늘날 미국은 미·러시아, 미·중 관계에서 과거와 유사한 도전에 직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개인적 유대를 바탕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강경한 민족주의자인 푸틴은 종전 협상에 소극적이었고, 두 정상 간 긴장이 점차 고조되고 있다.

전쟁의 종식은 트럼프에게 단순한 외교 성과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 혼란과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해 지지율을 끌어올릴 기회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그가 닉슨처럼 통상 압박과 미·중 데탕트를 병행하는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트럼프는 그간 금지했던 엔비디아 반도체의 대중 수출을 허가하고, 대만 문제에서도 중국 편을 드는 등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다. 관세 협상도 90일간 유예해 ‘빅딜’의 여지를 남겼다. 트럼프가 대중 적대정책을 철회하고 외교전략을 전면 수정할지 주목된다.

김성재 미 퍼먼대 경영학 교수·『관세 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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