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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오리엔트 최강의 제국’
오늘날 튀르키예 공화국 영토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는 북으로는 흑해, 남으로는 지중해, 서로는 에게해에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상 먼 옛날부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이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북부 시리아를 아우르는 땅은 기원전 17세기부터 기원전 12세기에 걸쳐 대제국 히타이트가 다스렸다. 발달한 금속 기술을 바탕으로 청동기 후기 강력한 국가를 형성한 히타이트는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의 전통적인 강국 이집트까지 위협했는데,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대결을 다룬 카데시 전투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전쟁 기록으로도 유명하다.
히타이트 제국 구성원들의 삶과 문화를 좀 더 친숙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 ‘히타이트: 오리엔트 최강의 제국’이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고대사 전문 박물관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튀르키예 공화국 문화관광부·초룸시와 국립김해박물관·김해시·한성백제박물관이 협력해 2024년 10월부터 약 4개월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열렸던 특별전시를 서울에서도 볼 수 있게 된 것. 조율희 학생기자와 임서희 학생모델이 김한성 한성백제박물관 학예연구사와 함께 전시를 살펴봤다.

히타이트는 이집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강대국이었지만, 그간 히타이트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었다. 19세기에 히타이트의 수도였던 하투샤의 유적이 발굴되고, 쐐기문자·상형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이 해독되면서 히타이트의 다양한 면모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도이자 정치·경제·종교의 중심지였던 하투샤는 낮은 지형에 자리 잡은 북쪽의 하부도시가 먼저 건설되고, 높은 지대의 남쪽 상부 도시로 확대·발전했다. 거친 산악 지형이 적의 침략 방어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아나톨리아 반도는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해 청동 주조 및 물품 제작이 활발했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최강국 중 하나였던 히타이트의 위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바로 청동무기다. 김 학예사가 유적에서 출토된 창·화살촉·비늘갑옷을 차례대로 가리키며 “히타이트 군대는 보병과 전차로 구성돼 있었는데, 병사들은 주로 청동으로 만든 단검·도끼·창 등으로 무장했어요. 보병은 기본적으로 창을 사용했지만, 원거리 공격용으로 활을 사용하기도 했죠”라고 설명했다.

히타이트는 철기 주조 기술을 전 세계에 확산한 주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하투샤 유적에서 출토된 활·갑옷·창 등 무기류는 물론 목걸이·펜던트·팔찌 등 장신구까지 여러 금속 유물의 대부분은 청동으로 만들었다. 당시에도 철을 다루는 기술이 존재했지만, 수준 자체가 뛰어나진 않아서 작은 크기의 물건을 제작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1595년 히타이트의 무르실리 1세가 고(古)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면서 히타이트는 근동 지역의 떠오르는 제국이 됐다. 전통적 강국 이집트와 때로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때로는 뛰어난 외교력으로 비등하게 겨뤘다. 전성기 히타이트의 국력과 위상을 잘 보여주는 전투는 기원전 1274년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와 이집트의 람세스 2세가 카데시에서 오리엔트 세계의 패권을 두고 벌인 전투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각자 큰 손실만 입고 물러나 갈등을 되풀이하던 끝에, 15년 후인 기원전 1259년 히타이트의 하투실리 3세와 람세스 2세는 상호불가침 등의 내용을 넣은 카데시 조약을 맺었다. 이는 성문으로 남아있는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으로 미국 뉴욕 UN 본부 외벽에 장식됐다.

히타이트의 면모를 알린 쐐기문자는 아래쪽이 위쪽보다 얇거나 뾰족한 나무못인 쐐기를 닮은 글자다. 기원전 35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탄생한 쐐기문자는 히타이트에서는 서기관·성직자·귀족·왕족 등 상위 계급이 사용했다. 그래서 쐐기문자로 남긴 점토판의 내용 역시 계약·조약 및 정부 서신, 법령, 종교 의례, 왕들의 계보 등 특정 분야로 한정된다.
쐐기문자는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새겨서 기록했는데, 점토판에 물기가 있을 때 모양을 잡고 끝이 뾰족한 새기개로 점토를 눌러 문자를 새겼다. 프랑스어·영어·스페인어를 보면 알파벳(로마자)을 사용하지만 언어의 체계나 어휘가 다른 것처럼 대제국 히타이트는 히타이트어를 비롯한 수메르어·후르리어·루위아어 등 8개 이상의 언어를 쐐기문자로 기록했다. 가장 많이 기록된 언어는 히타이트어이고, 그다음으로 많이 기록된 언어는 당시 이 지역의 공용어로서 국제 서신과 외교에 사용한 아카드어다.

반면 도장이나 공공장소의 기념물에는 주로 상형문자를 새겼다. 상형문자 하면 흔히 이집트를 떠올리는데, 히타이트의 상형문자는 이집트의 상형문자와는 전혀 다른 체계를 지닌 루위아어 상형문자다. 예를 들어 하투실리 3세와 왕비 푸두헤파의 공동 도장이 찍힌 점토 조각 중앙에는 제왕을 의미하는 상형문자(날개 달린 원반형 태양)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여왕을 상징하는 상형문자(머리 위에 둥근 고리가 있는 여성)가 새겨져 있다.
히타이트는 농업국가이면서도 다양한 산업을 장려했다. 점토판 기록에 따르면 가죽 공예를 하는 구두공과 허리띠 제작자부터 목공예를 하는 목수, 화살 제작자, 석재 공예를 하는 석공, 도장 제작자는 물론 도자기 공예, 세탁업, 양조 등 다양한 직업이 존재했다. 소중 학생기자단은 맥주를 제조할 때 쓰던 토기와 히타이트에서 많이 만들어진 형태인 새부리모양 입을 가진 항아리 등을 살펴봤다.

히타이트는 ‘1000명의 신을 가진 사람들’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신을 모셨던 나라이기도 하다. 히타이트인들은 도시를 정복하고 나면 정복지의 모든 신상을 가져와서 자신들의 신전에 모셨다. 더 많은 신에게 제물을 바칠수록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때문에 하투샤 유적에서는 30곳 이상의 사원이 확인돼 ‘신들의 도시’라 불리기도 한다.
히타이트인들은 점령한 나라에 자신들의 신을 강요하지 않았다. 정복지에서 새로 받아들인 신들은 본래 이름과 능력을 그대로 유지했고, 적지 않은 신들이 히타이트 신과 지위를 공유하거나 대체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히타이트는 광대한 영토에 속한 이들에게 히타이트의 권위와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농업국가였던 히타이트의 최고의 신은 번개와 천둥을 다루는 풍우신 타르훈나(테슙)였다. 풍우신이 비를 내려 밭을 비옥하게 하고, 풍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풍우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은 황소로, 히타이트 사람들은 황소의 상을 제단에 올리고 의례를 지냈다.
전시실에는 하투샤 상부 도시에서 발견된 ‘상형문자가 새겨진 방’의 탁본도 있다. 안쪽 뒷벽에는 태양신이, 오른쪽 벽에는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 방을 만든 사람은 히타이트 제국의 마지막 왕인 슈필룰리우마 2세로 추정된다. 아나톨리아 반도를 호령하며 이집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찬란했던 제국 히타이트는 기원전 12세기경 멸망한다. 그 원인으로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던 체제가 여러 복합적 이유로 한계에 이르렀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늘날 튀르키예 공화국이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이렇게 흥미로운 역사를 가진 대제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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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성선해 기자 sung.sunhae@joongang.co.kr,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